지난 2월 15일(월), 본지 기자단은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박영숙 사진작가의 스튜디오에 방문했다. 생활을 위한 공간과 촬영을 위한 암실로 나뉜 스튜디오는 박 작가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과 푸른 계열의 가구로 꾸며져 있었다. TV장 위에 줄지어 놓인 상패에선 그동안 1세대 페미니스트 사진작가로서 예술계에 이바지해온 그의 노력이 느껴졌다. 그가 자신의 삶을 사진에 바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본지 기자단은 본교 사학과 1기 동문이기도 한 박 작가와의 만남에선 그가 수십 년간 사진에 담아온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 ‘나’만의 자유로운 철학을 따라서
박영숙 사진작가에게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 확립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뜻한 바를 반드시 이뤄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박 작가는 본교 재학시절 치마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당시의 학칙을 거부하고 스스로 바지 교복을 만들어 입었다. 또 그는 여성이 자전거를 타면 아이를 못 낳는다는 유언비어에도 보란 듯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살아왔던 박 작가는 남성중심 사회에 순응할 수 없었고, 불합리한 이유로 여성이 무시당하는 현실에 자연스럽게 페미니스트가 됐다.

사학을 전공하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처음부터 사학과에 진학하고자 했던 건 아니었어요. 친구가 대신 대학 원서를 접수해 줬는데, 원래 희망하던 경상계열이 아닌 사학과로 접수가 된 거예요. 원서가 잘못 접수됐다는 사실은 대학 입학시험 당일에 알았어요. 그렇게 본교 사학과에 입학하자마자 바로 전과를 준비했는데, 전과를 하기 위해 사학과 전공과목을 열심히 공부하다가 사학이 의미 있는 학문이란 걸 깨닫고 사학과에 남게 됐죠.

사학과의 어떤 점이 작가님의 생각을 바꿨나요?
전공과목이었던 ‘사학개론’이 제게 큰 영향을 줬어요. 이 수업을 통해 세계 역사를 전체적으로 살피고 각 시대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법을 배웠거든요. 역사는 한 사람의 사소한 행동에서부터 시작하고, 한 시대를 지배하는 철학도 처음엔 작은 발상에 불과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동시대의 사회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삶은 옳지 못하다는 깨우침도 얻게 됐죠.

지난 1963년 본교 졸업을 앞두고 중앙사진동아리 '숙미회'를 창립하셨어요. 숙미회의 창립 계기가 궁금해요.
당시엔 여성이 카메라를 다룬다는 인식이 아예 없었어요. 다른 여자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본교에도 사진동아리는 없었죠. 저는 본교의 학생들이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이 되길 바랐어요. 총학생회 운영회의 때 예산 일부를 숙미회 창립에 지원해달라고 요청했고, 학생들의 동의를 얻어 숙미회를 만들게 됐죠.

숙미회의 첫 전시는 어떤 내용으로 이뤄졌나요?
제가 제안한 ‘서울역’이라는 주제로 첫 전시가 열렸어요. 서울역은 우리나라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유동 인구가 아주 많죠. 서울역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시에 담고자 했어요. 첫 전시는 언론사 인터뷰 요청이 쇄도할 정도로 화제가 됐어요. 여자 대학생은 예쁜 자연 풍경만 찍을 것이란 사회적 편견을 깬 것이 당시 숙미회의 전시가 큰 관심을 받았던 이유일 거로 추측해요.

부친의 영향으로 사진과 카메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다고 알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으셨는지 궁금해요.
아버지는 늘 제게 “몸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궁금한 뭔가가 생기면 직접 가서 확인하고 경험해 보라는 의미였죠. 제가 중학생이던 시절엔 카메라 한 대가 집 한 채 가격이었는데도 아버지께선 카메라를 마음껏 만지게 해주셨어요. 그 덕에 카메라와 친숙해질 수 있었죠.

진로를 사진작가로 설정하는 데 도움을 준 사진 작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대학교 2학년 때 사진 전시회에서 우연히 본 ‘파창’이라는 작품이에요. 깨진 유리창과 빛을 활용한 작품이었는데, 깨진 유리창에 빛이 반사돼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서 마치 빛이 제 앞에 쏟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죠. 낭만적인 풍경 대신 깨진 유리창을 활용한 사진의 ‘모던(Modern)함’이 제 마음과 딱 들어맞았던 극적인 순간이었어요. 사진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지 않았던 시대였음에도 ‘나도 저런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죠.

대학 졸업 후 잡지사의 사진기자로 일하셨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대학 졸업 직후 잡지사 「여상」에 사진기자로 취업했어요. 당시 사진부의 인원으론 저와 남자 부장 한 명이 전부였죠. 저는 독자들에게 시를 소개하는 ‘시와 사진’이란 코너를 통해 시와 어울리는 사진을 준비하는 일을 담당하게 됐어요. 피사체의 구도와 배치에 의미를 부여해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사진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죠. 사진에 대한 애정으로 촬영에 임한 만큼 해당 코너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인기투표에서 여러 차례 1등을 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어요. 첫 직장에서 큰 성과를 얻게 돼 당시 콧대가 꽤 높아졌던 기억이 있네요.

담당 코너의 반응이 좋았는데 잡지사를 그만두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당시 표지 사진은 사진부장만 찍을 수 있었는데, 부장은 늘 비슷한 구도로만 표지를 촬영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모델이 웃는 모습을 정면에서 촬영한 정형적인 사진만으론 모델의 개성을 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사진부장에게 직접 표지 사진을 찍을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고, 표지 사진에 대한 비판도 서슴없이 전했어요. 결국 이는 사진부장과 잦은 갈등으로 이어져 잡지사 전체에 사진부의 불화가 전해졌어요. 그러자 잡지사 운영진은 사진부장이 한 집안의 가장이라며 제게 권고사직을 요구했어요. 제가 사직한 이후에도 주변의 여성 기자들이 부당하게 언론사에서 쫓겨나는 일들을 빈번하게 접하면서 페미니즘에 뜻을 품게 됐죠.

▲박영숙 사진작가와 본교 중앙사진동아리 ‘숙미회’1기 부원의 모습이다.
▲박영숙 사진작가와 본교 중앙사진동아리 ‘숙미회’1기 부원의 모습이다.

■ 시공간에 머무르는 미친 영혼들
‘꽃을 보통 여인에 비기는 것이 문화이다. 아름답다. 연약하다.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 하며... 나는 그렇게 꽃과 여인을 그 어떤 대비구조로 다루는 문화가 거북하다. 이 모든 꽃에 대한 개념을 나는 전복시키고 싶다’
박 작가가 2005년에 발표한 프로젝트 ‘미친년 프로젝트_꽃이 그녀를 흔든다’에서 작품과 함께 소개된 ‘작가의 글’이다. 작가의 글이란 박영숙 사진작가가 작품을 작업하기 전 대중에게 전하고자 했던 정체성을 언어로 옮긴 것이다. 박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과 그들을 억압하는 편견을 향한다. ‘미친년 프로젝트_오사카와 도쿄의 페미니스트들’에선 일본 여성이 경험한 문화적 차별을, ‘미친년 프로젝트_레스비언 결혼식’에선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레즈비언의 결혼을, ‘그림자의 눈물’에선 사회의 차별을 피해 제주도 곶자왈로 숨을 수밖에 없었던 마녀의 흔적을 사진에 담았다.

▲지난 2005년 발표된 ‘미친년 프로젝트_꽃이 그녀를 흔든다’는 박 작가가 꽃의 개념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지난 2005년 발표된 ‘미친년 프로젝트_꽃이 그녀를 흔든다’는 박 작가가 꽃의 개념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작업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과정이 있나요?
작업에 들어가기 전 작품 의도를 담은 작가의 글을 꼭 써요. 작품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선 어떠한 작품도 나올 수 없어요. 이는 잡지사에 근무하던 시절 편집 회의에 참여했던 것에서 영향을 받았어요. 편집 회의에선 늘 어떤 주제를 어떻게 대중에게 전할지 논의했거든요. 잡지사를 나온 이후에도 작품의 주제와 전달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습관을 유지했고, 이는 작가의 글로 발전해 작품의 구체적인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사진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작업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라고 조언해요.

페미니즘을 담아낸 작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지난 1988년에 발표한 ‘마녀’라는 작품이에요. 여성운동단체 ‘또하나의문화’에서 활동하던 중 ‘서양에선 마녀를 생산한다’는 동료의 말을 처음 듣게 됐어요. 근대 유럽 때 기득권층로부터 학대받고 억울하게 화형에 처해진 피해자를 마녀라고 불렀는데, 처음 동료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받은 충격을 녹여낸 작품이 ‘마녀’예요. 억울하게 죽은 여성들의 영혼을 21세기로 불러와 위로하고 싶었어요. 마치 마녀의 영혼이 집으로 들어오는 듯한 사진을 *포토몽타주 기법으로 실감나게 구현 했죠.

▲지난 1988년 ‘여성 해방 시와 그림의 만남전’에서 전시된 박 작가의 ‘마녀’다. 과거 서양에서 마녀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여성들을 위로하려는 의도를 담은 작품이다.
▲지난 1988년 ‘여성 해방 시와 그림의 만남전’에서 전시된 박 작가의 ‘마녀’다. 과거 서양에서 마녀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여성들을 위로하려는 의도를 담은 작품이다.

유엔(United Nations, UN)이 제정한 세계여성의 해를 맞아 한국 여성단체협의회의 초청으로 사진전 ‘평등, 발전, 평화’를 단독 개최하셨어요. 해당 전시회를 통해 관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나요?
한국 여성의 현실을 세계에 전하고 싶었어요. 우선 한국 여성의 인권이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을 작품에 담았어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영등포역 뒤쪽 집창촌의 모습과, 닭장과 다를 바 없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의 암울한 현실을 알렸죠. 또 카이스트에서 냉장고만 한 컴퓨터를 다루는 여성의 사진을 통해 진취적인 여성이 등장했다는 변화를 함께 전했죠.

지난 1990년대 후반부터 진행해오신 ‘미친년 프로젝트’는 과감한 주제 선정으로 큰 화제가 됐는데요, 프로젝트의 주제로 ‘미친년’이라는 단어를 고르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회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 여성들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아 왔어요.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시와 문학에 도전한 허난설헌,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치에 맞선 명성황후,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기 전 남성부터 정조를 지키라 말한 나혜석도 그랬죠. 진취적인 여성들의 행보에 불편함을 느낀 남성들은 그들을 미친 여성으로 치부해왔고, 전 그 개념을 바로잡고 싶었어요. 

‘미친년 프로젝트_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에 드러난 여성들의 공허한 표정이 인상 깊었는데, 어떤 사연이 담겨 있는 건가요?
사진 속의 미쳐버린 여성들은 ‘나’이자 ‘우리’예요. 여성들의 일상은 결코 평범하지 않아요. 여성에게 일상이란 때로 지겹고 무서우며 끔찍한 것이 되기도 하죠. 또 많은 여성이 일상에서 자신의 삶을 착취당하거나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어요. 여성들은 오랫동안 그 상황을 억지로 참기도 하고 이해하려 하지만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탈출을 시도하게 돼요. 이때 육체를 일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건 어렵지만, 우리의 정신만은 아주 잠깐이라도 각자가 꿈꾸는 상황인 ‘미친년의 시공간’으로 도망칠 수 있어요. 제가 미친년 프로젝트로 표현한 것처럼 도마 위의 고등어를 내려치다가도, 화분에 물을 주다가도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순간, 잠시동안 우리가 만든 그 공간에 머무는 거죠.

▲지난 2002년 발표된 박 작가의 작품 ‘미친년 프로젝트_갇힌 몸 정처없는 마음’이다. 부엌에서 고등어를 자르는 여성의 영혼이 ‘미친년의 시공간’에 머물러 있는 것을 표현했다.
▲지난 2002년 발표된 박 작가의 작품 ‘미친년 프로젝트_갇힌 몸 정처없는 마음’이다. 부엌에서 고등어를 자르는 여성의 영혼이 ‘미친년의 시공간’에 머물러 있는 것을 표현했다.

■ 신진 작가를 향한 연대
박영숙 사진작가는 여성 연대의 중요성을 행동으로 실천해왔다. 본교 재학 시엔 학우들과 카메라를 함께 연구하고자 여대 최초 사진동아리 숙미회를 만들었고, 또하나의문화에선 회원들과 여성주의 글쓰기를 하며 의견을 교류했다. 지난 1998년엔 여성 사진작가들과 함께 한국여성사진가협회를 창립했다. 지난 2018년까지도 박 작가는 신진 사진작가를 위한 전시 공간 ‘트렁크 갤러리’를 차려 ‘한국 현대사진 스펙트럼전’을 기획하거나 여성주의 작가들의 전시를 지원해 왔다. 여성 문화 단체의 기록을 모으고 페미니즘 서적을 꾸준히 읽는 등 페미니즘을 향한 그의 열정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트렁크 갤러리를 차리시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신진 사진작가에게 단순히 스튜디오 공간을 제공하는 것만으론 그들의 작품활동을 충분히 지원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신진 사진작가를 외면하는 보수적인 사진계를 입 아프게 비판해왔지만 큰 변화가 없었고,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선 더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야 했죠. 트렁크 갤러리를 통해서 사진 수집가에게 신진 사진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활동을 했었어요. 이에 가족과 지인들은 신진 사진작가를 위한 갤러리로는 운영 유지조차 되지 않을 거라며 단언했지만, 실제론 무려 12년이나 운영됐죠.

지난 2018년 트렁크 갤러리가 문을 닫았어요. 갤러리 운영을 그만두시게 된 이유가 있나요?
아무래도 나이가 가장 큰 이유였죠. 그래도 갤러리 운영 유경험자로서 미술관에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지, 최근 사진계의 동향은 어떠한지 유심히 지켜보고 있어요.

최근 페미니즘이 여러 영역에서 부상하면서 페미니즘의 사회적 영향력도 커지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 박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세대 페미니스트로서 매우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해요. 페미니즘 역사의 가치를 인정하며 페미니스트 간 존중하는 분위기가 잘 형성돼야 한다고 봐요. 페미니스트 간의 소통과 연대도 중요하죠.

페미니즘에 입문하려는 숙명인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으신가요?
임옥희 작가의 여성학 이론서 「메트로폴리스의 불온한 신여성들」을 추천해요. 1920년대 서양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발화된 배경과 당대 여성들의 활약을 이해하기 쉽게 다뤄 최근 잘 읽고 있는 책이랍니다.


사진작가라는 길을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었냐는 본지 기자의 물음에 박영숙 사진작가는 활짝 웃으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족히 10년이 지난 작업 경험도 생생하게 이야기했고, 직접 찍은 사진 작품을 소개할 땐 매우 행복해 보였다. 물론 박 작가와 같이 자신만의 굳은 철학을 찾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점차 우리만의 철학이 만들어질 것이다. 박 작가의 계속되는 도전은 다음 세대의 여성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밑거름이 돼 주고 있다. 이처럼 우리도 자신만의 철학을 갈고 닦는다면 조금의 후회도 남지 않은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박 작가가 자신의 독일제 카메라를 들고 웃고 있다.
▲박 작가가 자신의 독일제 카메라를 들고 웃고 있다.
▲박 작가가 스튜디오에서 사진 인화 작업을 시연하는 모습이다.
▲박 작가가 스튜디오에서 사진 인화 작업을 시연하는 모습이다.

 

 

*합성사진, 동일화면 내에 다른 두개 이상의 영상을 합성하는 수법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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