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출판문화협회에 따르면 지난 한 해동안 모두 1만 2016권의 번역 도서가 출간됐다. 이중 일본 서적은 5164권으로, 우리말로 출간된 해외 도서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일본 서적은 어느새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책이 됐다. 일본 번역 서적만큼이나 우리와 가까운 것은 그 서적들의 ‘옮긴이’를 담당하는 번역가다. 양윤옥 번역가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옮긴이로서 문학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양 번역가는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등 수많은 일본 문학을 번역해왔다. 낯선 언어 너머로 따뜻한 감성을 전달하는 그와 함께 옮긴이의 말속으로 들어가 보자.

 

■번역가가 된 국문학도
양윤옥 번역가는 일본 문학 번역가임에도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는 특이한 이력이 있다. 외국어 전공을 선택하는 일반적인 번역가의 진로와는 사뭇 다르다. 또한 양 번역가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일본어 학습을 시작했다. 번역가의 세계에선 한 걸음 떨어져 있던 그가 어떻게 일본어를 접했고 어떤 계기로 번역가의 길을 걷게 됐는지 들어봤다.
 

번역하시는 언어가 아닌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셨어요. 특별히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신 이유가 있나요?
상당히 분명한 뜻을 가지고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했어요. 학창 시절 글쓰기로 칭찬을 받은 적도 있고, 학급 문집 만들기에 열정적이셨던 담임 선생님을 만나기도 했어요. 그런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소설가를 꿈꾸게 됐죠. 지금 생각해보면 우연에 따른 소소한 계기들이 맞물려 필연적인 결정으로 이어졌네요.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하신 걸 후회하진 않나요? 
성급한 결정이었을 순 있지만, 후회는 없어요. 요즘처럼 진로에 대한 정보가 많았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죠. 그렇지만 인생을 좌우하는 결정을 한다는 건 어떤 환경에서든 어려운 일이에요.

전공이 번역 일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번역은 외국어 능력과 이를 우리말로 잘 표현하는 능력이 모두 필요한 작업이에요. 그런데 글을 쓰는 능력, 습관, 감성은 외국어 실력보다 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다고 생각해요. 우리말과 글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구사하느냐가 번역가로서의 역량을 결정하는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죠. 국어 실력이 탄탄해야 번역도 잘 할 수 있어요. 어학을 등한시할 위험성이 있지만, 그래도 국어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싶네요.

모국어는 익숙하기 때문에 학습에 소홀해지기 쉬워요. 국어에 대한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추천하는 방식이 있을까요?
저에겐 대학 시절의 소설 습작이 도움이 됐어요. 직접 소설을 쓰다 보면 소설가 못지않은 문장력을 키울 수 있어요. 또 국내 문학도 꾸준히 접해야 해요. 번역할수록 외국어 실력은 늘지만, 원서에 지나치게 집중하게 되면 문장 구조가 국어 문법과는 멀어질 수 있거든요. 이는 제 경험담이기도 해요. 그래서 의식적으로 국내 문학을 읽으려고 노력하죠. 문예지를 정기구독하면 다양한 작가와 문학계의 최신 동향을 곧바로 알 수 있어 편리해요.

지난 2006년 SBS 인터뷰에서 일본 거주 경험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일본 생활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30년 전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갑작스럽게 일본으로 가게 됐어요. 외국 생활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가족을 떠나 이국만리로 가는 느낌을 받기도 했죠.

번역가는 외국어에 능통해야 한다고 알고 있어요. 일본에 가기 전부터 일본어를 잘 알고 계셨나요?
일본에 도착했을 당시엔 일본어의 기본 음절인 히라가나도 미처 떼지 못한 일본어 초보였어요. 현지에 적응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죠.

어떻게 일본어를 공부하셨는지 궁금해지네요. 특별히 말씀해주실 공부법이 있나요?
말하기와 쓰기는 제쳐두고 읽기에 전념하는 방식이었어요. 문법책은 기본서 한 권으로만 공부했죠. 저는 대학 졸업 후에 출판사에서 일했을 정도로 책에 관심이 많았어요. 일본은 어떤 책을 출판하는지 너무 궁금해졌죠. 서점에서 골라온 책을 사전을 뒤적여가며 혼자 공부했어요.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과정을 거쳤죠. 이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인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번역하다가 독해가 어학 공부에 상당히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무라카미 하루키도 고등학교 때부터 헌책방에서 영어 *페이퍼백(Paperback) 한 무더기를 사서 꾸준히 읽은 결과 큰 어려움 없이 알파벳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스치다 다카시의 「지구를 부수지 않고 사는 방법」으로 1993년부터 번역가 활동을 시작하셨어요. 첫 번역 작품으로 이 책을 정하신 이유가 있나요?
일본에서 지낼 당시 서점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게 바로 ‘환경 서적’ 서가예요. 한국은 환경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던 때였는데 일본엔 이미 전용 서가가 마련돼 있었으니까요. 「지구를 부수지 않고 사는 방법」도 그 서가에 꽂혀 있던 책 중 하나였죠.

첫 번역 작품을 작업하시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지구를 부수지 않고 사는 방법」은 일본에서 지낸 지 2년째가 되던 해에 번역한 작품이에요. 단편 소설 여러 편을 손글씨로 번역하는 연습을 거친 후에 본격적인 번역 작업을 시작했죠. 이는 타자기를 빠르게 치며 작업한 첫 작품이기도 해요. 당시 책의 내용에 개인적으로 공감한 부분이 많았어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번역에 몰두하게 됐죠. 그러나 막상 번역을 마치자 출간해 주겠다는 국내 출판사가 없었어요. 2년이 지난 후에야 ‘한살림’ 출판부를 통해 겨우 세상에 내보낼 수 있었죠.

처음 번역 일을 시작하셨을 땐 일거리를 찾기도 쉽지 않으셨겠어요. 번역 일거리는 어떻게 찾으셨나요?
다행히 대학 시절이나 출판사 시절의 인맥을 통해서 종종 일거리가 들어왔어요.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을 땐 일본 소설을 주로 출간하는 출판사에 찾아가 스스로 일을 찾기도 했죠. 출판사는 늘 번역가를 기다리더라고요.

소설가 지망생 출신으로서, 소설과 비교할 때 번역엔 어떤 매력이 있나요?
번역은 소설가의 꿈이 점점 멀어져갈 때 찾아낸 또 다른 재미였어요. 소설은 무(無)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지만 번역은 ‘무’에서 시작하진 않아요. 번역은 이미 완성된 내용을 주니 상대적으로 편하고, 창작의 부담도 적죠. 작가들이 공들여 짜낸 이야기 속이 바로 내 일터가 된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해요.

▲ 지난 1993년 출간된 스치다 다카시의 책「지구를 부수지 않고 사는 방법」이다.
▲ 지난 1993년 출간된 스치다 다카시의 책「지구를 부수지 않고 사는 방법」이다.

 

■유연하고 깊이 있는 번역을 위해
양윤옥 번역가는 성장하는 번역인이다. 일본어 초보였던 양 번역가가 유능한 번역자가 된 것은 더 나은 번역을 위해 어학 능력과 문학 감수성을 키워온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침내 그는 지난 2005년 노마 문예 번역상을 받으며 전문 번역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노마 문예 번역상은 일본에서 출간된 일본어 문학을 현지 언어로 가장 우수하게 번역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이제 양 번역가의 이름 앞엔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베스트셀러 번역가’ 등의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다. 또한, 양 번역가는 소설 이외에도 수필, 만화, **라이트 노벨(Light novel) 등의 여러 장르를 번역하며 자신만의 번역 세계를 넓혀나가고 있다. 양 번역가의 성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2005년 한국인 최초로 노마 문예 번역상을 받으시며 일본 문학 대표 번역가로 자리 잡으셨어요. 수상하시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수상 소식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선정됐는지까진 잘 알지 못해요. 다만 수상작이었던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이 일본에서도 난해하기로 유명한 작품이어서 번역의 난도 때문이 아닐까 짐작만 했죠. 

국제적인 번역상을 받으신 이후 번역가로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일거리가 부쩍 많아졌어요. 그렇지만 한 사람이 일할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부상으로 받은 상금과 영국 여행 티켓이 사실 더 좋았답니다.

지난 2015년엔 노마 문예 번역상의 심사위원을 맡으셨어요. 심사위원으로서의 경험은 어땠나요?
노마 문예 번역상은 예심에서 꼼꼼하게 각 작품의 장단점 등을 기록해 본심으로 넘겨요. 본심에서 선별되는 작품은 그 중 ‘가장 실수가 적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심사 과정에서 새삼 번역자는 발 뻗고 자기 어려운 직업이란 생각도 했어요. 책 한 권에도 수많은 문장이 있는데, 번역하던 중 어디서 어떤 실수를 했을지 모르니까요. 번역상 심사위원을 해 본 뒤론 실수 없는 번역을 위해 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책상 앞에서 보내게 됐어요. 그 다음 단계는 그저 독자들의 양해를 바라는 것뿐이죠.

지난 2017년 독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번역 작품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꼽으셨어요. 그 외에도 번역하신 작품 중에서 좋은 기억으로 남은 작품이 있나요?
앞서 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예요. 최근 작품으론 히가시노 게이고의 「녹나무의 파수꾼」, 「교통 경찰의 밤」 등이 있어요. 특히 지난 2월 말에 출간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는 제목부터 표지까지 신박했던 작품이라 더욱 기억에 남아요.
사실 제겐 모든 작품이 인상적이에요. 바로 며칠 전까지 끙끙거리며 번역에 매달렸던 책과 애증의 감정이 뒤섞인 채로 이별할 때, 책의 감상이 기억 속에서 마지막으로 반짝 빛나요. 그러고 나선 또 얼른 잊어버려야만 다음 작품으로 뛰어들 준비를 할 수 있죠.

미스터리 소설 「유성의 인연」, 라이트노벨(Light novel)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에세이 만화 「집주인 할머니와 나」 등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번역을 해 오셨어요. 장르에 따라 번역 방식도 달라지는지 궁금한데, 번역에 있어 장르별로 특히 신경 쓰시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어떤 작가든 자기만의 문체가 있어요. 그 문체를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따라가다 보면 일정한 흐름이 만들어지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변화, 그중에서도 세태의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려는 자세예요. 그래서 저는 되도록 다양한 장르를 만나 보려고 해요. 야베 타로의 「집주인 할머니와 나」, 오카노 유이치의 「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 같은 에세이 만화를 번역하게 된 건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현재의 조언을 미래로 옮기다
번역가의 불안한 전망은 꾸준히 대두되는 문제다. 대다수의 번역가가 어려운 상황과 대면하고 있다. 이는 출판 시장의 불황, 인공지능 번역기의 등장, 프리랜서 번역가의 열악한 처우 등이다. 그러나 양윤옥 번역가는 번역 업계의 전망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은 않는다. 유연한 시각을 지닌 그에겐 개인의 역량을 키우고 불황에 대비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그는 종이 서적 이외에도 번역을 해야 하는 다른 콘텐츠가 많아지고 있다는 데 이견이 없기도 하다. 번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그의 시선을 따라가 봤다.
 

번역가 대다수가 회사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로 일한다고 알고 있어요. 프리랜서는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수입도 불안정한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근무 환경을 극복할 방법이 있나요?
꽤 오래전이지만 한 출판협회에서 내는 정기간행물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어요. 짧은 답변 형식이라서 ‘번역료는 책 출간 비용의 몇 퍼센트인가’라고 답했어요. 번역료는 중요한 문제예요. 그런데도 일부 번역가는이익 배분 같은 정보에 무관심하거나 관행을 따르곤 하죠. 번역가도 다른 프리랜서와 똑같이 성공 가능성이 높은 곳에 뛰어들고, 실력을 쌓아 자신 있게 일하고, 그에 따라 합당한 보수를 요구할 수 있도록 계산하고 협상하는 능력이 필요해요.

인공지능 기술 및 번역기의 발달로 번역가라는 직업이 사라질 것이란 의견도 있어요. 번역 업계의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인공지능 작가의 소설을 인공지능 번역가가 옮기는 시대예요. 그러나 정보를 입력하는 일엔 인간의 힘이 필요해요. 깊고 유려한 문장과 짧고 쉬운 문장 모두를 넘나드는 능력을 갖춘 번역가들이 미래의 번역 업계를 이끌어갈 거라고 생각해요.

최근엔 비교적 내용이 가벼운 문학 매체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지난 1월 네이버(Naver)가 글로벌 1위 웹소설 플랫폼 왓패드(Wattpad)를 인수했고, 카카오 게임즈(Kakao games)는 올해 자사의 기존 서비스 게임을 일본에 출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어요. 이러한 흐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즐길 수 있는 매체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졌죠. 문학도 갈수록 양극화되고 있어요. 순수문학을 통해 뭔가를 생각하고 배우고, 그게 무겁게 느껴질 땐 오락성 강한 인터넷 소설을 읽는 거예요. 저는 둘 다 재미있다고 봐요. 국내 웹툰과 웹소설도 즐겨 읽곤 해요.

마지막으로 번역가를 꿈꾸는 대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조언이 있나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충고지만 전문 번역가를 지망하는 분들에겐 외국어 작문은 적정 수준으로만 하는 것을 권할게요. 글쓰기는 뇌 안에서 아주 많은 것들이 유기적으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작업이에요. 따라서 고도의 글쓰기를 외국어로만 반복해서 훈련하게 된다면 외국어가 뇌세포에 각인돼 모국어와 엉켜버릴 수 있어요. 또한 미래의 번역가들에게 그 노력과 애환에 대한 깊은 공감과 사랑을 보낼게요. 여러분의 건투를 빌어요.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양윤옥 번역가가 옮긴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속 한 구절이다. 양 번역가는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자신의 지도를 그리고 수정을 거듭해 가며 번역가로서의 길을 걸어 나가고 있다. 그는 단편 소설에서 장편소설, 추리소설에서 라이트노벨까지 번역의 폭을 넓혔다. 이처럼 유연한 태도는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그만의 준비라고 볼 수 있다. 양 번역가의 삶의 태도를 고려해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보라. 하루하루의 조각이 모여 당신이 나아갈 길을 가리킬 것이다. 

 

*종이 한 장으로 표지를 장정한 싸고 간편한 책을 이름. 
**주로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가벼운 대중 소설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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