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과거와 미래를 인지할 수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해 현재를 더 나은 삶으로 만드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혹자는 개인이 겪어보지 않은 과거나 너무 먼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말한다. 현재를 살아나가기만 해도 바쁜데, 100년 전 과거나 100년 후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공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는 현재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아무리 먼 과거나 먼 미래라도 현재 우리 삶과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미래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전시, ‘황금광시대’와 ‘현실이상’을 소개한다.

 

황금狂시대, 일민미술관, 10.8~12.27

우리에게 100년 전은 어떤 시간일까. 누군가는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최초의 동아일보사 소속 여성 기자 허정숙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전통과 신문물이 혼재한 경성 거리의 풍경을 상상하게 하는 시대일 것이다. 지난 10월 8일(목)부터 오는 12월 27일(일)까지 종로구에 위치한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1920 기억극장 《황금狂시대》’ 전시는 1920-30년대 경성의 기록을 재현한다. 이번 전시에선 5개의 서로 다른 주제로 경성을 설명한다. 10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은 경성의 기억을 2020년의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신여성이 남긴 여성해방의 기록 1920년대의 경성은 신여성의 활약이 대두된 시대였다. ‘1920 기억극장 《황금狂시대》’의 ‘신여성 편집실: 조선희 「세 여자」’ 전시실에선 당대 여성 해방 운동에 앞장섰던 신여성 세 명을 조명한다. 소설 「세 여자」의 등장인물이기도 한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가 그 주인공이다. 허정숙은 동아일보사 최초의 여성 기자이자 잡지 「신여성」의 편집장으로서 이름을 알렸다. 주세죽은 사회주의자 박헌영의 부인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본인 역시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 활동에 활발히 참여한 여성 해방 운동가였다. 고명자는 ‘조선공산당의 여성 트로이카’라 불릴 만큼 열정적인 여성 사회주의자였다고 한다. 전시실 내에선 그들의 활동 내용이 담긴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다. 당시 신여성들은 단발을 주창해 여성에게 불합리하게 강요된 관습을 깨뜨리고자 했다. 주세죽은 1925년 8월호 「신여성」에 조선 여성이 단발을 해야 한다는 기고문을 싣기도 했다. ‘나는 단발을 주장하는 것이 하등 새 사상이나 주의를 표방함이 아니오. 또한 일시 신유행에 감염되여 기분으로나 양풍 중독으로써 주장함이 아니외다. 실생활에 감하야 편리하고 또한 위생에 적합한 여러 가지 이점을 발견한 까닭입니다’ 이처럼 주세죽은 생활의 편리와 위생을 위해 여성이 단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정숙과 고명자 또한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여성의 단발은 불명예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펼쳤다.

목소리로 듣는 문화주택
1920년 일제를 통해 조선에 전해진 문화주택은 주거환경에 혁신을 불러왔다. 문화주택은 서양 주택의 공간구조와 외관을 따라 지어진 주택이다. 이번 전시에선 조선 최초의 한인 건축가인 박길용 건축가가 만든 가장 기본적인 문화주택 도면을 볼 수 있다. 정우영 일민미술관 학예사는 “욕실과 부엌이 실내에 설치된 문화주택의 유행은 대중의 전반적인 위생 의식이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 ‘뮌(MIOON)’의 ‘유일한 휴양처, 안락의 호―옴: 픽션 픽션 논픽션(2020)’은 관객들이 100년 전 문화주택의 청취를 느낄 수 있는 구조물이다. 뮌은 박길용 건축가의 평면도를 따라 얇은 LED 뼈대를 세워 문화주택의 사각형 골조를 재현했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개인 헤드셋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100년 전 문화주택에 살았던 윤성덕 피아니스트를 인터뷰했던 기자다. 그는 100년 전 자신이 방문했던 문화주택에 다시 찾아가 인터뷰를 요청한다. 관람객은 기자와 윤 피아니스트의 대화를 청취하며 불규칙적으로 빛나는 문화주택의 골조를 감상할 수 있다. 문화주택의 재현은 당시에도 현재와 유사한 재개발 운동과 부동산 과열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관람객에게 전달한다. 뮌은 일민미술관에서 진행한 아티스트 토크(Artist Talk)에서 1920년 이후의 건축 시류에 대해 “100년 전에도 서울 도심에선 성급한 재개발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며 “재개발로 인해 주거의 빈부격차가 심화됐다”고 말했다. 문화주택은 이처럼 최근엔 대부분 사라지고 없는 건축양식이나 부동산 문제의 뿌리로써 현대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 거리를 걷다

가상현실과 가상의 인물을 매개체로 경성의 일상을 경험해보는 작품도 전시됐다. 권하윤 작가의 ‘자유와 검열의 경계에서: 구보, 경성 방랑’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주인공 구보 씨와 도시 경성을 탐험하는 VR(Virtual Reality) 체험을 제공한다. 해당 VR로 구현된 도시 경성은 *만문만화 속 캐릭터들로 채워졌다. 관람객은 젊은이들이 몰려든 경성을 돌아보며 전차를 타거나 카페를 구경할 수 있다. 전차 앞에선 황금팔뚝 시계와 보석 반지를 지닌 신여성들이 줄지어 서 있고, 무표정한 청년들이 카페에 앉아 멍하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관람객은 VR을 통해 만난 100년 전 경성의 젊은이와 현재 청년들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도 있다. 1929년 조선박람회의 개최와 함께 교통수단이 발달하며 많은 사람이 경성으로 몰려들었다. 정 학예사는 “VR 내에선 구보처럼 현대적인 지식인이지만 일거리가 없어 하릴없이 카페에 앉아있는 청년들의 모습이 그러졌다 ”며 “현대의 청년들이 취업 준비나 공부 등의 이유로 카페에 빼곡히 앉아있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이하 AI)으로 구현된 구보 씨와 대화하며 경성의 모습을 느낄 수도 있다. 오주영 작가의 ‘문학시간극장’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주인공인 구보 씨에게 1920-80년대의 문학 문장 30만 건과 희곡 48권을 학습시킨 AI 프로그램이다. 관람객이 ‘커피’ ‘경성역’ 등의 키워드를 입력하면 구보 씨 AI가 학습한 문장들을 바탕으로 대답한다. 관람객은 구보 씨 AI와의 대화에서 경성을 살아가던 시민들의 말투나 분위기를 익힐 수 있다.

관람객이 권하윤 작가의 '구보, 경성 방랑' 전시에 설치된 VR(Virtual Reality)을 체험하고 있다.
관람객이 권하윤 작가의 '구보, 경성 방랑' 전시에 설치된 VR(Virtual Reality)을 체험하고 있다.

 

현실이상 (Reality Errors ), 백남준 아트센터 , 09.24~01.31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지난 9월 24일(목)부터 개최한 ‘현실 이상’ 기획전은 기술진보의 과정에서 소외된 윤리적·사회적 현안들을 재조명한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생활의 많은 부분이 편리해졌다. 그러나 반대로 사회 제도나 시민 의식은 기술에 비해 느리게 발전하기도 한다. 이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물질문화의 속도를 비물질문화가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을 문화 지체 현상이라 한다. 과학기술과 사회제도, 시민의식이 발맞춰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가족의 재정의, 비혈연 공동체
혈연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족 구성의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더이상 혼인이나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만이 가족을 이루지 않는다. 쉐어 하우스(Share house), 비혼 공동체, 1인가구 등 다양한 주거 형태의 등장으로 가족의 전통적인 형태가 해체되기 때문이다. ‘현실 이상’ 기획전에선 가족 구성을 혈연이나 결혼 관계로 한정하지 않는 미래 사회의 필요성을 짚는 작품들이 전시됐다. 

박혜수 작가의 ‘퍼펙트 7’은 비혈연 가족공동체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들을 뒷받침 할 제도가 없는 현실을 지적한다. 퍼펙트 7은 생활동반자법이 통과된 2030년을 바탕으로 한 가상의 기업이다. 기업 이름의 숫자 7은 이성 결혼가족을 제외한 ▶이성커플 ▶동성커플 ▶성애 비혼가족 ▶비성애 친구가족 ▶1인가구 ▶가족협동조합 ▶돌봄가족의 7개 가족 형태를 의미한다. 박 작가가 제시한 가상의 생활동반자법은 혼인과 혈연 이외 관계의 사람들도 가족이 될 수 있음을 규정한다. 생활동반자법에 의해 정의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은 이성 결혼가족과 동일한 법적 권리와 복지를 보장받는다. 

생활동반자법이 존재하는 미래에서 퍼펙트 7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가족 형태를 계획하고 등록하는 것을 돕는다. 해당 기업은 보험사로서 가족이 부득이한 사유로 해체될 때 발생하는 손해를 보상해 주기도 한다. 계약서와 보험까지 동원해가며 임의로 가족을 구성하는 모습이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퍼펙트 7에 따르면 서류상의 근거에 의해 동거인의 권리를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 이는 동거 가족의 구성부터 해체까지의 모든 과정을 스스로 처리해야 했던 개인의 부담을 덜어준다. 

퍼펙트 7은 비혈연 가족공동체의 성격에 따른 새로운 주거 공간을 기획하기도 한다. 기존 공동 주택은 좁은 개인 공간들이 빽빽하게 연결된 형태였다. 최대한 많은 가구를 수용해 공간을 경제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반면, 퍼펙트 7에서 설계된 공동 주택은 개인 공간과 공유 공간을 함께 제공한다. 퍼펙트 7의 공동 주택의 공유 공간엔 비혈연 가족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관이 드러난다. 채식주의자 공동체가 채소를 기를 수 있는 텃밭을 공유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해당 공동 주택을 설계한 이경용 ‘팀 히치하이커’ 건축사무소 소장은 “제도와 부동산, 건축 설계가 균형 있게 발전해 비혈연 가족공동체의 다양성을 반영한 공간이 확대돼야 한다”고 말했다.

인공지능과 윤리 사이의 마찰음 
우리 일상에 스며든 인공지능의 객관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들도 있다. 인공지능은 기계적인 시스템과 알고리즘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에 객관적일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박현아 작가의 저서 「인공지능 말을 걸다」에 따르면, 인공지능에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엔지니어의 시각이 반영될 경우 인공지능이 편견이 담긴 정보를 학습하기도 한다.
 
매튜 케루비니 작가의 작품 ‘윤리적 자율주행 자동차’는 특정 알고리즘이 적용된 자율주행 시스템이 다양한 사고 상황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관람객은 자율주행 시스템의 알고리즘이 가장 우선할 가치를 인명, 보호, 이익 중에서 선택한다. 선택한 알고리즘에 따라 같은 사고 상황이라도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가령 쓰러진 나무와 충돌해 자율주행 자동차 운전자가 크게 다치거나, 충돌하기 직전에 대통령 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통령이 차에 치이는 두 가지 상황의 시나리오가 제시됐다고 하자. 이익을 우선하는 알고리즘을 선택했다면 자율주행 시스템은 나무와 충돌하는 쪽을 고를 것이다. 대통령이 운전자보다 자산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반면 운전자의 안전을 우선하는 알고리즘을 선택한 경우, 자율주행 자동차는 대통령과 부딪히게 된다. 이러한 자율 주행 자동차에 활용되는 알고리즘을 설정하는 과정에선 물건뿐 아니라 사람까지도 물화의 대상이 된다. 개발자가 알고리즘의 정보 처리에 필요한 우선순위를 정할 때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의 가치까지 평가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아티스트(American Artist)의 ‘2015’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되는 예측 순찰 시스템을 소재로 한 영상이다. 영상 속에서 순찰차는 시스템의 지시에 따라 범죄 가능성이 있는 지역으로 이동한다. 그 과정에서 흑인 거주 지역을 집중적으로 순찰하며, 자가용에서 물건을 꺼내는 평범한 흑인 여성을 위험인물로 포착해 안면인식 정보를 수집하기도 한다. 영상에선 결국 범죄로 의심될만한 인물의 행동이 포착되지 않고, 영상을 시청한 관람객은 예측 순찰 시스템의 정확성을 의심하게 된다. 

지난 5월 미국에서 한 백인 경찰관이 흑인 남성이 총기를 가지고 있다고 오해해 체포 과정에서 목을 졸라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인종에 대한 편견을 기반으로 흑인 남성을 위험인물로 판단해 발생한 과잉진압이었다. 윤리적 자율주행 자동차와 2015, 이 두 영상작품은 관객에게 인공지능 기술 역시 인간의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아메리칸 아티스트(American Artist)의 2015로, 뉴욕 경찰이 운영 중인 예측순찰시스템의 녹화영상이다.
아메리칸 아티스트(American Artist)의 2015로, 뉴욕 경찰이 운영 중인 예측순찰시스템의 녹화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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