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시 내려감은 눈과 우아한 손동작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사진(▲)은 카라얀이 전속 사진사를 두고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이다. 20세기 클래식 음악계를 이끈 지휘자 카라얀은 이처럼 자신의 이미지 마케팅에 뛰어난 수완가이기도 했다.

 


#1
카라얀은 빈 국립가극장의 감독관인 숙부를 통해 어릴 때부터 유명 지휘자들의 지휘 모습을 어깨너머로 볼 수 있었다. 또한 은사이자 지휘자인 파움가르트너가 지휘자가 되길 권하는 등 지휘자가 되기에 남들보다 유리한 배경을 갖췄다. 그러나 훗날의 카라얀을 만든 것은 배경적 요소 외에도 성공을 향한 카라얀의 야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야망이 컸던 카라얀은 나치 입당이라는 용서받지 못할 전력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카라얀은 1935년 독일 아헨 극장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치 당원이 돼야 했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지휘자가 되기 2년 전부터 나치 당원이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나치에 자진 입당하고, 훗날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나치의 원조를 받아 ‘지휘자 카라얀’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1945년 독일이 패망하자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감금된 채 지낸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기보다 지휘 공부에 전념하며 대지휘자로 위상을 펼칠 날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 날은 1954년 11월 독일의 대지휘자 푸르트뱅글러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시작됐다. 카라얀이 푸르트뱅글러가 맡았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됐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30여년이 넘게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로 활약하며 지휘자의 위상을 굳혔다. 이후 1989년 7월 카라얀은 오페라 <가면무도회>의 리허설 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0세기 클래식을 주름잡던 거장이 지휘봉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2
카라얀의 지휘에 맞춰 연주하는 베를린 필의 음악을 들으면 소름이 돋는다고 한다. 한치의 오차 없이 조율된 기계들이 연주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연주는 카라얀의 정확하고도 객관적인 음악 해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늘 치밀하면서 카리스마 있는 통솔력으로 곡의 완성도를 높였다.
카라얀은 놀라운 지휘 솜씨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반 산업 발전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산업 시대의 음악은 더 이상 예술이라는 서정적인 이름으로만 존재할 수 없게 됐다. 이에 카라얀은 스테레오부터 디지털까지, 발전하는 음향기술을 바탕으로 레코딩 및 영상물 제작에 열정을 쏟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많은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때문에 혹자는 카라얀을 부와 권력에 젖은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레코딩에 심열을 기울인 것은 단지 부의 축척 때문만은 아니다. 음반에 담겨 길이 남을 자신의 음악처럼, 카라얀이라는 이름도 후세에 길이 남길 원한 그의 열망 또한 크게 작용했다.


카라얀 생전의 비도덕적 행동들은 여전히 비판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적 영향력이 빛을 발하는 이유는 곡의 핵심을 짚어내는 그의 탁월한 심미안 때문일 것이다. ‘불멸의 마에스트로’라는 명칭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기에 ‘20세기 지휘계의 큰 별 카라얀’은 100년이 흐른 지금도 빛나는 것이 아닐까.

저작권자 © 숙대신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