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하여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S에게
요번 겨울은 늦추위가 심하구나. 개강이 다가오는데도 날씨가 풀리지 않아서 아직 봄을 못 느끼겠어. 그러나 머지않아 숙명 교정에는 진달래 개나리보다 예쁜 숙녀들이 모여들겠지. 꿈을 향해 달려가는 너희에게 몇 년 전 감명 깊게 읽었던 책 한 권을 소개하려고 해. 일본의 대표적 현대 소설가인 엔도 슈사쿠의 대표작으로,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을 다룬 역사소설 『침묵』이라는 책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하곤 하지. 많은 기독교의 덕목 가운데 ‘사랑’이라는 이 말은 이제나저제나 변함없이 누구나 좋아하는 단어인데……. 그것을 실천하는 문제에는 누구나 자신이 없어. 그런데 이 책을 읽은 다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문제를 생각하며, 내 마음이 맑고 깨끗해졌던 기억이 나는구나.


포루투칼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페레이라 신부는 주교로서 혹독한 일본인의 고문을 받고 배교를 하게 된단다.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는 교회의 불명예로써, 그의 제자들인 포르투칼 사제 네 명이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잠복 선교를 떠나게 되는데, 이 책은 그 중의 한 사람인 로드리고 신부가 일본에 도착하면서, 위험한 도피 생활 끝에 결국 배교의 길을 가게 되는 기막힌 상황을 묘사하고 있어. 가톨릭 신도들이 남녀 모두 학살되어 한 도시가 황폐화되고, 또는 신도들이 물에 잠겨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로드리고 신부는 “하나님 어디 계세요? 더 이상 침묵하지 마세요.”라며 간절히 기도했어.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침묵하셨고 결국 로드리고 신부도 계속되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를 결심하게 되는데, 배교의 마지막 과정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린 성화를 밟는 것이었어.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예수님의 얼굴을 밟기 위해 발을 들었을 때, 그는 발이 저린듯한 통증을 느꼈어. 그때 그분이 말씀하셨지.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그분은 침묵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어.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지.


하나님의 사랑이란, 이렇게 남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의 깊이야. 나를 없애고 낮아져서 나를 주는 것이 사랑이란다. 그리고 그것은 예쁜 입술로 말하는 것보다, 손을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는 사랑의 실천이 중요한 것 같아. 네가 영어 학원에 등록을 하고 두꺼운 원서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며, S야! 그런 것들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나누는 따듯한 사람이 되도록 항상 네 마음의 창을 닦을 수 있기를 부탁한다.

노혜숙(중어중문학전공)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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