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의약분업 실시 이후 약국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더니 요즘은 길목마다 약국이 없는 곳이 없다. 전국 통계로 따지면 2만이 넘는 수치니 이쯤 되면 거대 시장이라고 할 만큼 약품시장 규모가 커졌다. 이렇게 약품업계가 대형화될수록 빛나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전국의 ‘팜 네트워크’를 책임지는 약품 도매 업체 ‘지오영’의 대표이사 조선혜(약학 77 졸) 동문이다. 약대생이었던 시절부터 전국의 약품 유통을 담당하는 ‘큰손’이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조 동문의 삶 이야기를 들어봤다.


약품유통업계의 빛나는 ‘여걸’
약대 출신이라면 으레 약사가 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조 동문은 왜 약사를 하지 않고 경영 일에 뛰어든 것일까? “약대 졸업을 하고 병원에서 약국장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의약품 유통이 굉장히 낙후가 돼 있다는 것을 알았죠. 그런 상황을 보고 ‘ 내가 한번 바꿔보자’하고 생각했어요.” 당시 그의 나이 서른 여섯.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굳힌 결심은 곧 그를 일개 약사에서 도매상으로 변신시켰고, 현재는 약품유통업계의 ‘여걸’이란 칭호까지 얻게 했다.


2002년 처음 출범한 지오영은 사업 시작 일 년 만에 국내 도매업체 빅3에 오를 정도로 대단한 성장을 이룩했다. 또 지난 5월에는 인천에 전자동화 시스템을 장착한 초대형 물류센터를 세워 의약품 물류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멍가게보다 ‘이마트’같은 대형마트는 소비자들이 편리하도록 상품 진열이 질서정연하게 돼있잖아요. 이 분야도 마찬가지에요. 약품 유통 체계에 자동화시스템을 도입해 물품 보관이나 배송 질을 높였죠. 일본, 동남아, 미국도 가봤는데 그 곳들에 비해 우리 시스템이 훨씬 월등하더라고요.”


지오영을 이렇게까지 성장케 한 것은 조 동문의 혜안 덕분이었다. 지금 당장의 시장의 흐름보다는 1년 뒤, 2년 뒤, 5년 뒤를 예측함으로써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사업을 구상했다. “앞서 성장한 선진국과 우리나라의 상황을 비교해요. 이런 식으로 앞일을 예측해보는 일이 워낙 체질화돼있어서 나중에 보면 그 예측들이 거의 적중하더군요.”


나를 키운건 팔할이 일 욕심과 긍정적 사고
현재 지오영의 회장은 두 명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일을 조 동문이 맡고 있어 실무에 관한한 그는 사내 ‘일인자’이다. 그러나 여성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만만치는 않았을 터, 회장이 되기까지의 어려움은 없었는지 물었다.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 다른 회사 사장들하고 통화하면 ‘사장 바꿔달라’고 말하더군요. 여자가 전화를 받으니 당연히 비서인줄 안 거에요.”


조 동문이 이런 남성 중심적인 기업문화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은 무한한 ‘일 욕심’과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 덕분이었다. “일만 보면 나도 모르게 욕망이 끓어오르더라고요.” 그래서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쉰다섯 살이 되면 쉬면서 여행을 다니겠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지금 상황으로만 보면 아직은 먼 이야기 같다고 말한다.


또 그는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싫어한다. “일 하는 데 있어 문제가 조금 있는 것뿐이지, 알고 보면 정말 할 수 없는 것이 아닌 상황이 많아요.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얼마나 더 끌어올리느냐가 나의 숙제이기 때문에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가 나중에 걸러내요.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하면 나중에 걸러낼 것이 없잖아요.”
그는 평소 경험을 중시하는 편이다. “좋은 리더가 되려면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모든 업무를 꿰뚫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해요.” 그는 업무 중 직원들로부터 받은 질문에 대한 해결방안을 내리는 데 5초에서 10초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적인 업무에 대한 개선점을 모두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조 동문은 직원들에게 있어 어떤 리더일까? “굉장히 카리스마가 강한 편이에요. 칭찬을 많이 해야 하는데 직원들을 보면 아직은 뭘 해도 부족해보이거든요. 한번은 직원들이 나한테 ‘회장님께 혼만 안 나면 다행이에요.’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이 혼내요. 가끔 리더십 연수를 받으면 계속 칭찬하라고 그러던데 나는 그게 잘 안 나와요. 이제 정말 칭찬 해줘야지(웃음).”


방황이 내게 알려준 것은 목표 의식
남다른 선견지명을 갖고 있는 그답게 어려서부터 마음먹은 대로만 살아왔을 것 같은 조 동문도 실은 ‘엄마 말 안 듣고 고집부리던 아이’였다고 한다. “저희 어머니가 숙전 출신이셨는데, 제가 어렸을 때부터 딸은 약사, 아들은 의사. 이렇게 자식 진로를 아예 정해놓고 키우셨어요. 그런데 내가 화학이나 물리 같은 이과과목을 싫어해서 공부를 참 안했어요. 그래서 어머니는 저를 아주 원수 보듯 하셨죠. 그런데 한번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엄마 시절에는 여성들이 그냥 살지만 너희 시대에는 전문자격증 하나만 있으면 여성도 자신감 있게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얘길 듣고 약대에 들어갔죠.” 하지만 적성에 안 맞는 공부를 하려니 좀체 정이 붙질 않아 대학 4년 동안 방황만하다가 졸업을 했다. 그렇게 졸업한 그는 어렸을 적부터 관심 가졌던 디자인 관련 분야 일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다시 학교에 돌아와 전 총장이었던 정규선 교수님 밑에서 조교 생활을 했다.


조 동문은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기 싫다고 한다. 학교 다닐 적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만 했기 때문이란다. “대학을 졸업하고 철이 들었지. 조교생활을 하면서 도서관에서 책 반납하러 가는 길에 봄이면 목련꽃이 엄청 피어있었어요. 그 꽃을 보면서 대학에 다니던 4년간 공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를 참 많이도 했죠. 그러고 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목표설정 같아요. 내가 방황했던 건 뚜렷한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거든요. 목표가 정해진 사람은 하루하루를 바라보는 일이 뿌듯하다고 해요. 대학생이라는 굉장히 좋은 시기에 우리 후배들 모두 자기 목표를 잘 설정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자랑 못하겠어요. 잘 했다고 스스로 거들먹거릴 수 없고요. 아직도 나는 갈 길이 멀거든요.” 누가 봐도 그의 지금 모습은 당당하고 멋진, 성공한 경영인의 모습이지만 스스로는 만족할 수준이 아니라며 손을 휘젓는다.


사실 조 동문은 인터뷰 시작 전부터 인터뷰 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누차 얘기했었다. “아직 다 이루지도 않았는데 벌써 잘났다고 포장되기는 싫거든요. 내가 생각한 목표의 8~90%가 완성됐을 때라면 여유롭게 인터뷰도 하고, 책도 쓸 수 있겠죠. 그렇지만 멀었어요. 아직은.” 일 욕심 많은 조 동문답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평가도 매우 혹독하게 했다.


그가 설정한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서 앞으로 채울 나머지 부분은 바로 제약부분의 외국 진출과 국내 ‘토털 헬스케어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다. “제조부터 판매까지 약품에 관한 전 과정을 책임지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이뤄야할 일이랍니다.” 그가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자면 쉬기로 작정했던 쉰다섯의 나이를 훌쩍 넘길 수밖에 없지만 조 동문은 전혀 싫지 않은 내색이었다. ‘이러다가는 평생 일만 할 것 같다’며 호탕하게 웃는 조 동문. 그에게서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무한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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