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모든 게 지금까지보다 더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과거에는 항상 끝났던 곳에 이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옛날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내면이 생겼다. 이제 모든 게 그곳으로 간다.

- 말테의 수기-(Rainer Maria Rilke 저, 문현미 역, 민음사) 중에서

‘오직 독일 시를 완전하게 해 놓은 일밖에 없는 사람’으로 칭송받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남긴 유일한 소설은 바로 ‘말테의 수기’이다. 그가 ‘로댕연구’를 집필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후 쓴 이 작품은 각각의 내용이 뚜렷하게 연결되지 않고 암시와 은유가 빈번하게 이뤄져 일반적인 소설읽기의 즐거움을 찾기는 어렵다. 이런 이유로 처음 발표됐을 때에는 취약한 형식을 가진 소설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 속 내용은 자의식을 바탕으로 한 현실인식과 실존적 존재에 대한 의문을 재기하는 일련의 공통점을 갖는다.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없어서 안 될 것은 섬세한 자기관찰과 묘사이다. 작품의 주인공 말테는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인물로 다양한 주제와 관련한 자신의 인식을 진솔하게 풀어놓는다. 어린 시절에 받았던 느낌에 있어서도 생생하게 설명된다. 어떤 대상은 은유법으로 숨기기도 하면서 독자의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예를 들자면 가면에 갇힌 채 거울을 보는 장면은 실재하는 자아와 거울 속의 확장된 자아의 경계가 팽팽해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결국 경계는 허물어지고 자의식의 혼돈을 초래한다. 이런 진술들은 내재된 의미와 함께 뛰어난 감각 묘사로 작가의 역량을 드러내면서도 독자가 주제에 대해 고민하도록 실마리를 제공한다.


다양한 표현 방식을 통해 화자는 불안, 고독, 죽음 등을 논한다. 화자는 낭만과 예술의 중심 파리에 있지만 그가 느끼는 것은 가난과 퇴폐와 같은 도시문명의 부정적인 단면이다. 어린 시절의 말테를 끝없이 괴롭힌 것도 불안과 두려움이다. 이 같은 인식은 전통적인 세계관에 배치되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본질적 의미를 재고하게 하는 원인이다. ‘말테의 수기’는 릴케의 작품세계에서 분수령으로 인식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앞선 내용에 있다. 릴케의 초기 작품은 주관성이 짙고 감상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가 파리를 체험하고 쓴 ‘기도시집’ 3부와 ‘말테의 수기’에서 서서히 본질에 대한 의식이 드러난다. 이 개념이 심화돼 후기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말테가 파리에서 느낀 도시문명의 어둠과 불안은 소외 계층에 대한 인식으로 연결된다. 가난하고 병든 그들을 보며 자신의 처지와 동질감을 느끼지만 자신은 깨끗하고 흰 손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르다는 입장을 밝힌다. 그러나 곧 깨끗함은 사회의 인정을 받으려는 위장에 불과하다고 고백한다. 말테의 고백은 신빙성이 있는 듯하지만 전체적인 그의 태도를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빈민을 피해 도서관을 찾는 점, 높은 신분이었다는 것을 반복해서 언급한다는 점, 소외된 자들을 타자의 눈으로 관찰할 뿐이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애초에 말테에게는 자신을 소외 계층과 동일시하려는 의지는 없어 보인다. 다만 감정적 동조자일 따름이라 짐작된다.


실존적 의문에 대해 말테는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한다. 소설 안에서 다양한 인물을 통한 접근도 이뤄졌지만 말테는 어렴풋한 방향만을 제시하여 여운을 남긴다. 본질에 대한 탐구와 정체성의 인식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는 너무 조급해도, 태만해도 안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테의 수기’는 예리한 성정을 가진 주인공을 통해 놓치기 쉬운 문제를 비추면서 독자의 자각을 촉구한다. 분명한 결론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에 더 많은 독자들이 말테와 함께 본질과 정체성을 찾는 여행을 진지하게 할 수 있길 희망해 본다.

                                                                                                                                      임다희 (인문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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