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무엇이든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사람이 있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한 TV 광고 얘기다. 광고에서 남자 성우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며 의-식-주, 아침-점심-저녁, 믿음-소망-사랑, 머리-가슴-배, 눈-코-입을 예로 든다. 철수-영희-바둑이를 언급하는 대목에선 카피의 장난스러운 의도를 눈치 채고 실소를 머금게 된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혼신을 다해 탐구해 온 주제를 가볍고 유쾌하게 다루는 품새가 일품이다.

 변증법적 역사 발전론에 따르더라도 세상의 많은 것은 정반합이라는 삼원 구조를 가지고 진화한다. 사물이 3원적이기도 하고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이 3원적이기도 하다. 3차원으로 이뤄지는 절대 공간성이 우리의 인식을 규정하고, 그 인식이 세상을 규정한다. 당연히 세상 자체도 하나가 아니다. 플라톤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서구의 관념론적 세계관에 근거해 보면 세상은 세 개의 서로 다른 버전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지각하고 알고 있는 세상이 첫 번째이고, 매체를 통해 재현되는 세상이 두 번째이고, 주관의 개입 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것이 세 번째 세상이다. 앞의 두 세상이 현상이라면 세 번째 세상은 본질이다.

 얼마 전 한 일간지에서 자체적으로 전국 122개의 4년제 대학을 평가하고 그 순위를 발표했다. 그 신문사가 판단한 ‘숙명’의 위치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숙명’과 재현된 ‘숙명’과의 괴리가 큰 만큼 충격도 컸다. 수년째 계속 국가고객만족도(NCSI) 최상위권을 유지해 온 우리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 평가의 불합리성에 대해 일일이 지적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언뜻 보기에도 문제가 많은 평가이지만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번 점검케 한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이번처럼 언론에 비친 숙명의 모습이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한바탕 홍역을 치른다. ‘재현된 숙명’이 ‘인식되는 숙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것이 다시 ‘객관적 숙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흥분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언론의 몇 줄이 숙명의 본질을 좌우할 수 있다는 생각은 경박하기 그지없다.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본질이 더욱 중요해진다. 이제는 이런 해프닝에 대해 조금은 의연해질 필요가 있다. 숙명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는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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