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볕 더위와 싸우다 보니 어느새 여름의 끝자락이 지나가고, 아침ㆍ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 영문과 대학원에 들어 온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학기다. 나는 학부 때는 수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대학원에 입학할 당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수학, 영어 전공해서 보습학원 차릴 거냐?’였다. 그럴 만도 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와 이과로 나눠 학습을 하는 교육제도에서 나는 수년에 걸쳐 극에서 극을 횡단한 셈이다.


수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방황하고 있을 무렵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혼잡한 지하철에서 영어로 쓰인 책을 읽고 있는 한 여대생이었다. 평범한 학생처럼 보였던 그가 원서를 읽는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그것이 영문과에 들어오게 된 계기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원 없이 ‘폼’을 잡으며 지하철에서 원서를 읽고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자, 단순한 ‘폼’이 아니라 내용에 빠져 정신없이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는 나를 발견한다.


대학원에 들어와서야 전공이 세부적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았다. 언어학, 번역학, 문학, 그 중에서도 나는 주저 없이 문학을 택했다. 중ㆍ고등학교 때 곧잘 읽었던 세계 명작들을 원서로 읽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르네상스희곡 수업 시간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20세기 미국소설 수업시간에는 ‘위대한 개츠비’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을 원서로 읽으면서 무한한 감동을 받았다. 불과 10년이 채 되기도 전에 읽었던 책들, 그때 느꼈던 감정과 지금의 감정들. 더욱이 수업시간의 토론이 내게는 하나의 전율로 다가왔다. 하나의 작품에서도 써진 시대와 작가에 따라,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나 많은 관점들이 나올 수 있는지를 알게 됐다. 사람들과 작품에 대해 토론을 하다보면 세 시간의 수업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이렇게 나는 내 의지대로 시작한 삶에 즐거움과 감동을 맛보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죽거린다. 영문학 배워서 어디에 써 먹느냐고. 모르는 소리다. 문학 작품 속에는 사람들의 삶이 녹아있다. 시대가 다르고 지역이 달라도 어디에서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가 녹아있다. 그리고 그런 문학 작품을 읽고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보다 깊은 삶의 진리를 배우게 된다. 요즘 인문학의 위기라고 매스컴에서 외치고 있지만 적어도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는 철저히 인문학을 즐기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세상은 너무나 살기 편해졌고, 계속해서 발전하고 진화하고 있다. 더욱이 이제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무엇이든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휴대폰은 신체의 일부인 듯 어디를 가도 우리에게 떨어지지 않는다. 인터넷 역시 매일 새로운 정보를 쏟아내고 있어 굳이 책을 뒤적이지 않아도 클릭 몇 번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살기가 편해진 만큼 세상은 더 삭막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문학 작품들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삭막한 세상에 메마른 감정을 촉촉이 적셔준다. 문학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이다. 문학 작품은 그 시작에서부터 현실을 반영했고, 소설이 처음 발생했던 18세기나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별반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문학 작품 안에서 인생을 배워나간다. 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을 읽고 연구하다 보면 삶이 한결 여유로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디지털 세상에서 문학 작품을 읽으며 아날로그적 삶을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문학적 삶이 아닐까 한다.

김지영 (영문과 대학원 석사 3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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