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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기억하는 민중의 'Che' 게바라
서어리 기자  |  smpser71@s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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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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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철학의 대명사로 알려진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어떤 인물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라(Ernesto Guevara de la Serna)’라는 평범한 스페인어 이름을 가졌던 한 사람, 그러나 그 이름에 스스로 ‘친구’라는 뜻의 ‘체(Che)’라는 애칭을 붙임으로써 훗날 많은 이들에게 꿈의 상징이 된 사람, 그는 바로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이다.


오는 9일은 체 게바라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꼭 40년 되는 날이다. 그가 살았던 격정의 39년 생애에 배를 더한 시간이 흘렀다. 그는 현재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위인’으로서 추앙받고 있다. 심지어는 그가 파괴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본거지’ 미국과 유럽에서도 그는 매력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시대와 사상을 초월하고 그를 기억하고, 그를 본받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생애를 돌아보며 이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1928년 게바라는 보헤미안 기질이 다분한 아르헨티나의 어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병약했던 탓에 의학을 전공했지만,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보헤미안 기질은 그를 좁은 공간에 놔두지 않았다. 그가 20세 초반이던 1951년, 그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나아가 열정과 젊음의 호기심 너머의 ‘무엇’을 보기 위해 배낭을 꾸리고 오토바이에 올랐다. 그렇게 떠난 두 번에 걸친 남미 여행은 그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전환기였다. 안데스 산맥을 가로지르고 칠레 해안을 따라 사막을 횡단한 후 쿠바,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경을 건넜던 그의 뇌리에 박힌 것은 가난한 민중들의 삶이었다. 미국의 식민지화가 된 남미 대륙의 민중들을 보며 그는 빈곤을 추방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혁명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본질적 모순을 먼저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는 곧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6년 과테말라 혁명에 가담했다가 탈출해 멕시코로 망명하던 중 그는 ‘카스트로 형제’를 만났다. 게바라는 카스트로 형제와 함께 미국의 원조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던 쿠바 정부를 몰아내고 진정한 민중 국가 건설을 다짐한다. 수많은 게릴라전 끝에 결국 그들은 1958년 산타 클라라전투에서 승리했고, 마침내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를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쿠바 혁명 성공 후 체 게바라 앞에는 엄청난 특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 받는 민중들을 택해 콩고와 볼리비아로 건너가 다시 게릴라전사로서 혁명운동을 주도했다. 혁명 후 권력을 분배해 또 다른 권좌에 선 혁명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그는 혁명의 순수성을 지켜나간 것이다. 그러나 부대를 이끌고 볼리비아에 잠입해 투쟁하던 중 볼리비아 반군추격대에 체포당하고 말았고, 1967년 10월 9일, ‘지금의 실패는 결코 혁명의 종말이 아니다.’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총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게바라는 볼리비아에서 죽음을 당할 때까지 자신이 이십대에 가졌던 꿈을 버리지 않았다. ‘부자에게 부를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게바라의 목표는 부익부 빈익빈이 편재한 인간사회에서 ‘좀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그의 변함없는 목표였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스스로 민중으로 남기를 바랐다. 쿠바에서 장관 등 중요 직책을 맡으면서도 그는 때때로 사탕수수 밭에서 농사일을 도왔고, 부를 축적하기 거부하고 공무원 월급만을 받기를 고집했다. 체 게바라는 이상과 신념을 그대로 실천한 혁명가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정치적 입장 자체에 취약점도 있었다. 그가 세웠던 정부는 선거도 없이 스스로의 임명에 의해 이뤄졌다. 이는 곧 대중 민주주의의 부재, 대중의 사회 조직 참여 부재를 의미한다. 어떤 이들은 이 때문에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가 미국에 반대한 것은 옳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정치 전략 때문에 오늘날의 쿠바는 사회주의를 자처하면서도 시민적 자유나 민주적 절차까지도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체 게바라의 생애를 되짚어보는 데 대해 누군가는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념으로 증명된 이 시점에서 웬 무장 공산혁명가 이야기냐’며 일축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혁명의 성패 여부를 떠나 ‘체 게바라’라는 인물이 가지는 매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난달 아르헨티나의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여전히 고국 사람들에게 있어 20세기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두터운 ‘팬’층을 갖고 있다. 그 이유를 압축하자면 당시의 ‘시대정신’을 가장 완전하게 구현했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그 혁명적 삶』이라는 전기를 펴낸 미국 전기작가 존 앤더슨은 ‘그가 60년대의 신화가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게바라의 전기를 쓰기 위해 지난 5년간 전 세계를 누빈 그는 90년대 이후 ‘게바라 열풍’이 대중문화 곳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앤더슨은 이런 열풍의 원인에 대해 ‘영웅 없는 이 시대가 영웅의 요소를 갖춘 그를 부른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가 게바라 티셔츠를 입는 이유를 ‘단지 그가 외형상 풍기는 ‘저항 이미지’가 좋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에게 붙여진 ‘베레모를 쓴 제임스 딘’이라는 또 하나의 별명처럼 그는 대중에게 팝스타나 영화배우와 같은 ‘스타’로 보여 질 뿐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식 자본주의에 저항했던 그는 오늘날 자본주의 문화적 아이템의 총아로써 각광받은 셈이다.

그를 바라보는 입장이야 어찌됐든 간에, 게바라는 오늘날 냉소로 가득한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꿈을 꾸게 할 ‘열정’의 불을 지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혁명’을 수행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그가 했던 말, 그가 일기에 적어내렸던 글귀들은 차츰 순수를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향수로 남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게릴라: 정규군이 아닌, 소규모의 무장 집단이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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