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쇼몽>에 등장한 스님은 두려운 표정으로 말한다. “인간은 모두 변명뿐이야. 이제 인간이 인간을 믿을 수 없게 됐어.”라고.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폐허가 된 일본을 배경으로 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은 사건을 둘러싼 증인들의 진술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도적 다조마루에게 아내는 겁탈당하고 남편은 살해당한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관아에서는 네 명의 증인에게 진술을 듣는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진술을 해, 결국 진실의 행방은 묘연한 채 이야기는 끝이 난다.


미궁에 빠진 진실의 모습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서도 볼 수 있다. <살인의 추억>은 1986년 화성에서 여인들이 무참히 살해된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로 이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건 해결을 위해 지역토박이 형사 박두만(송강호)은 오랜 경력으로 쌓아온 자신의 육감을 이용해 범인을 추적한다. 반면 서울 경찰서에서 자원해 온 서태윤(김상경)은 과학수사를 주장하며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 노력한다. 두 형사는 각자 자신의 수사법을 고집하며 범인을 찾으려하지만, 단 하나의 증거도 남기지 않는 범인의 철두철미함 앞에 그들의 수사법은 무용지물일 뿐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라쇼몽>과 <살인의 추억>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데에는 인간의 이기주의가 작용했다. 두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같은 사건을 자기 중심으로, 자신이 유리한 방향으로 각각 다르게 진행시킨다. <라쇼몽>에서 도적, 부인, 남편은 도적의 남자다움과 부녀자의 정절 그리고 사무라이의 명예를 위해 각자 다른 진술을 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고 한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형사들의 이기주의를 볼 수 있다. 가시적인 성과만을 중시하는 박두만은 살해된 향숙이를 짝사랑했던 백광호(박노식)에게 협박과 폭력을 사용해 거짓을 자백하게 만든다. 다행히도 마지막 현장 검증 때 백광호의 혐의는 풀리지만, 박두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며 진실을 왜곡하려 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라쇼몽>과 <살인의 추억>은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이기주의가 진실을 가릴 수도, 조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기주의에 의해 과장, 축소된 진실의 모습은 <라쇼몽>과 <살인의 추억>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진실을 은폐, 변질시킨 결과는 혼란, 충격, 믿었던 상대로부터의 배반만이 남는다는 것도 살펴볼 수 있다. <라쇼몽>과 <살인의 추억>은 이러한 결과를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았지만 이기주의에 의한 진실의 왜곡을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말로를 미리 경고해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 도움 주신 분: 우리 학교 황영미(의사소통센터) 교수

저작권자 © 숙대신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