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역 4번 출구로 나가서 돌담길을 걷다 보면, 고적한 풍경 너머로 세련된 건물이 보인다. UN 산하기구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건물이다. 4층으로 올라가 사무총장실로 들어섰다. 실제로 마주한 그는 사진보다도 젊어 보여 고희를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이것도 최근 들어 많이 피곤해진 거에요. 예전에는 사람들이 15년, 20년 젊게 보고 그랬답니다.” 기자가 지금도 그만큼 젊어 보인다고 응수하자 “나도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과로한 행동을 하긴 해.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요.”라며 웃었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국내외로 바쁘게 뛰다 보면 건강과 젊음은 애초에 포기 해야할 자리일 듯하다. 그러나 그는 사무총장직을 15년째 연임하며 아직도 건강과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그 비결이 궁금하지 않은가? 박 동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비결을 찾아보자.




"수석장학금으로 투피스 맞춰 입었어요"


박 동문에게 학교 다닐 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나 학교 다닐 때 얘기하면 무슨 조선시대인 줄 알더라고……. 그건 아닌데.”라며 농담섞인 항변을 했다. 그는 대학시절의 자신을 ‘평범하고 조용한 학생’이라고 평가하며 그때의 추억을 풀어놓았다. 그러나 기자가 듣기에 대학시절 박 동문은 그의 말과 달리 평범하기보다 비범했다.
그는 영어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영문과에 진학했다. 금요일마다 ‘프라이데이 클럽’에 참가한 것도 영어를 더 배우고 싶어서였다. 지금처럼 동아리나 학회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상황을 생각하면 대단한 열의다. “프라이데이 클럽은 영어로 노래를 부르거나 토론을 하는 영어 동아리에요.” 문득 당시 대학생들의 관심사가 궁금해 어떤 토론이 오갔는지 물었다. “헝가리 사태 같은 시사적인 문제가 토론 주제였죠. 아, 그러고보니 생각나는 주 토론주제가 있네요.” 박 동문이 기억하는 주제는 ‘남녀 사이에 우정이 가능한가.’와 ‘내가 원하는 직업을 얻으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였다. 이성과 진로에 대한 문제다. 시대가 바뀌어도 대학생의 관심사는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가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다고 해서 공부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55년인가, 56년인가 등록금을 다 냈는데 수석 장학금을 타게 됐다고 통보 받았어요. 돌려받은 등록금으로 명동에 나가 투피스를 맞춰 입었죠.” 명동으로 쇼핑가는 지금의 학우들과 그때의 박 동문이 겹쳐진다. 그는 정말 자신의 말처럼 평범한 학생이기도 했나보다.
“대학 시절 저는 목표지향적으로 살기보다 현실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어요.” 영어 동아리 활동이나 학과 공부에 충실했다던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현재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인 듯하다.





"다양한 사회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죠"

 
박 동문이 졸업할 무렵 여성들은 대부분 비서와 교사로 진로를 정했다. 박동문도 영어교사 자리를 제의받았지만 외교관처럼 국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원했기에 거절했다. 그리고 당시 남자들이 주로 했던 일에 거침없이 이력서를 냈다. “외무부, 코리아헤럴드, 동아일보 등 여기저기 지원했어요. 다 붙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에요.” 이러한 도전 끝에 그는 동아일보 1기 수습기자로 당당히 합격했다.
그러나 입사 후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그가 가고 싶었던 외신부가 야근이 잦은 탓에 금녀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대신 사회 곳곳을 돌아볼 수 있는 사회부나 지방부를 많이 돌면서 일했어요.” 그는 남자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남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오기보다 자신의 몫은 다해야겠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부딪혀 봐야 해요.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답니다.”
바쁜 기자생활 중에도 그는 자기 계발을 위한 공부를 놓지 않았다. 신문사 일이 끝난 오후에는 서울대학교 신문연구소를 다니며 언론 공부를 계속했고, 종국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공부를 마친 후에는 신문사로 돌아가지 않고 성대와 우리 학교 강사를 거쳐 가족계획협회에 입사했다. 그는 “새로운 곳에서 일하는 것은 늘 즐겁거든요.”라며 이러한 선택의 이유를 밝혔다.
가족계획협회는 박정희 정부시절 인구폭발이 경제개발의 방해요소로 지적되면서 주요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홍보부장이었던 그는 출산율을 줄이고자 여성지위향상에 주안점을 두고 홍보했다. 기자가 언뜻 들으면 여성지위향상이 인구문제와 상관없어 보인다고 하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구유지를 위해서는 한 가정에 두 명의 자녀가 적당해요. 그러나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그 둘 다 딸일 경우 아들을 낳을 때까지 출산했죠.” 그는 남아선호사상이 없어지지 않는 한 가족계획사업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여성지위향상에 큰 목소리를 냈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유명한 표어도 박 동문의 손을 거쳐 퍼진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인구가 4,000만이 넘어선 이듬해에는 전국 16곳에 인구시계탑을 세워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다.
박 동문은 가족계획협회의 경험이 없었다면 유니세프 사무총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가족계획사업과 아동권익의 연관성 때문이다. “아동권익 신장에 가족계획사업은 무척 중요해요. 못사는 나라일수록 부모가 자녀의 의식주를 책임질 수 없는데도 일곱 명 여덟 명씩 아이를 낳아 아동사망률이 높거든요.”





"도움받던 우리가 이제는 도움을 줍니다"

 
80년대 중반, 유니세프 내에서 우리나라가 부강해졌으니 공여국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논의 끝에 94년 우리나라는 공여국이 됐다. “도움을 받던 수혜국에서 도움을 주는 공여국으로 전환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그 해, 박 동문도 초대 사무총장에 이어 제2대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88년 대외담당관으로 주한 유니세프에 입사한 지 5년 반만의 일이다. 그는 이렇게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새로운 직함을 얻게 됐다. 많은 사람에게 환갑은 일선에서 물러나 휴식기를 갖는 나이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였다.
곧 기구 내에 주둔해 있던 국제직원이 철수했다. 박 동문은 한국 실정에 맞게 조직을 정비하고 체제를 구축했다. 위원회가 있는 공여국은 자국의 사람이 업무를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자리가 굉장히 복합적인 능력을 요구해요. 자원봉사부터 국제회의까지 닿는 면이 많아서 챙겨야 할 것도 많거든요.” 사무총장으로 취임한 해의 일을 회상하면서 박동문은 잠시 감격에 젖었다. 공여국 자격으로 처음 참석한 뉴욕 유니세프 집행이사회 때 일이 생각나서였다. 회의에서 그가 구호분담금으로 300만 불을 내겠다는 목표를 밝히자 이사국 대표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유니세프 내에서 한국이 최빈국과 중진국을 거쳐 당당히 다른 나라의 어린이를 돕는 선진국으로 올라선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그 해 목표를 넘어선 360만 불을 모금했다.
한국이 내는 유니세프 구호분담금은 99년 말부터 서서히 늘어나 현재는 1,500만 불에 이른다. 또한, 2005년에는 지금 있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건물을 새로 짓기도 했다. “항상 감사하고 행복해요. 나는 후배들이 알다시피 6ㆍ25도 겪은 세대 아닙니까? 6ㆍ25때 유니세프가 주는 구호품도 직접 받아봤어요. 그랬던 우리가 이제 세계 아동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기자로 9년 반, 가족계획협회에서 12년, 유니세프에서 19년, 화려한 경력이다. 또 길기도 길다. 박 동문은 기자 시절 사회 곳곳을 돌며 얻은 경험을 가족계획협회에서 활용했다. 그리고 가족계획협회 시절 터득한 사회사업의 기술을 유니세프에서 꽃피웠다.
그는 한 곳에서 꾸준히 일했지만 항상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계속 발전했던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계발. 그가 지금까지도 젊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젊어진다고 말하는 그의 말뜻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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