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칼럼]

혹독한 코로나19의 계절을 보내며, 함께 밥을 먹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던 타인이 일상에서 점차 배제됐다. 이제 일상의 결정은 필자의 몫이다. 취향을 맞춰나갈 상대방이 없으니 필자의 기호는 뚜렷해졌다. 필자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취향도 알게 됐다. 바깥세상과 거리를 두고 오롯이 자신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코로나19 확산 이전의 필자는 ‘자신이 깊이 이해하고 있는 대상’만 좋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을 함부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일이 큰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한눈에 반한다는 표현은 드라마 속 진부한 대사에 불과했고, 오래 탐구해오지도 않은 분야를 주제로 이야기를 늘어놓는 행동은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잘 모르는 대상이더라도 감히 좋아할 수 있게 됐다. 오히려 잘 모르기에 좋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정작 그 깊은 속내는 외면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필자는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존중하는 것,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무지를 용감하게 인정하는 것이 코로나 시대의 사랑이 아닐까 한다.

필자는 레트로(Retro) 패션과 1980-90년대의 오래된 음악을 좋아한다. 이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낡은 새로움'이라는 모순적인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당시를 겪어보지 않은 필자에게 과거에 유행했던 옷과 음악은 복고보다 새로움에 가깝다. 필자는 종종 ‘산울림’ ‘장덕’ ‘김광석’의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낸다. 필자가 100만큼 불행하다고 느낄 때, 산울림의 <무지개>와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를 들으면 적어도 50만큼은 행복해진다. 최근에는 LP판에 관심이 생겨 언젠가 책꽂이 가득 LP판을 수집하는 상상을 한다. 오래된 것들은 촌스럽고 번거롭지만, 그 안에는 낭만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고 갈망하는가. 당신의 사랑을 듣고 싶다. 많은 일상을 잃어버린 요즘, 반대로 얻은 것을 찾는 작은 역설을 시도해보면 어떨까. 불호와 혐오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고 나에게 귀 기울여보자. 빠르게 달리다가 헛발을 디디면 누구나 넘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내던져진 종목은 삶이라는 장거리이기에, 묵묵히 털고 일어나 다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시간이 흐르고 뒤돌아보면 우리를 넘어뜨렸던 거대한 돌부리는 작은 돌멩이가 돼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 여름, 눈부시게 흘린 우리들의 땀방울은 볼품 있음이 분명하다.

법 20 김정헌

*해당 글의 제목은 가수 잔나비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 없지만’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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