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외향적인 사람들을 두고 ‘사회생활을 잘한다’며 입을 모아 칭찬하는 것은 과연 합리적일까.

우리 사회는 내향인을 환영하지 않는다. 외향성은 장점, 내향성은 단점으로 여기는 편협한 견해는 사회 구성원이 페르소나(Persona)를 형성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페르소나는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정신분석학자인 융에 의해 널리 알려져 현대에선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이르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지만,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 이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내적 자아와 페르소나 간의 격차가 더욱 클 것으로 보인다.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만 살펴봐도 우리 사회가 내향인에게 가진 편견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담임 교사는 말이 없고 소극적인 학생들을 부정적으로, 활달하고 적극적인 학생들은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대인관계가 활발하고 발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이 반드시 훌륭한 인격을 가졌다고 단정 지을 순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교실에서, 회사에서, 나아가 사회에서까지 외향적인 사람이 되기를 강요받곤 한다.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개인의 성격이 비난의 대상이 돼야 할 이유는 없다. 사회가 요구하는 특정 인간상에 맞춰 완벽한 페르소나를 꾸며낸다고 하더라도 페르소나와 내적 자아의 괴리감은 더욱 커지고 만다. 그런 와중에 진정한 나의 모습을 잃지 않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타인의 인정보다 중요한 가치는 바로 자신의 인정이라는 것을 모두가 유념하길 바란다. 타인의 평가가 절대적이고 영원한 기준은 아니다.

불가피하게 외향성을 연기하고 있는 몇몇 내향인을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가 구성원에게 들이미는 일종의 틀이 조금이라도 물러지길 바란다. 획일화된 사회는 끊임없이 소외를 재생산할 뿐이다. 탁한 고정관념이 미처 피어나지 못한 예비 인재들의 잠재력까지 흐리도록 둘 것인가, 말수로 사람을 판단하는 대신 성격의 다양성을 포용함으로써 다채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데 일조할 것인가. 이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다만 시대에 따라 사회가 바라는 인간상은 언제나 바뀌어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지금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타고났거나 후천적인 노력으로 발달한 외향성이 낮게 평가받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성격은 지문과도 같아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기 마련이다. 분명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지내기 위해선 적응과 융화도 필요하지만, 성격의 획일화가 그 수단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다채롭기에 더욱 아름다운 사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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