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없는 ‘텔레그램(telegram)’을 이용한 성착취 범죄, 일명 ‘n번방 사건’이 수면 위로 올랐다. 잔혹하고 치밀한 범죄 수법에 수많은 여성은 분노했고, 1년여의 투쟁 끝에 해당 사건이 국회청원을 통과하게 됐다.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이하 개정 법률안)이 통과된 지난 4일(수), 개정 법률안이 통과됨으로써 여성들의 목소리가 전면 반영된 ‘국민동의청원 1호 입법’이 이뤄졌다는 내용의 기사가 쏟아졌다.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여성혐오 범죄의 싹을 드디어 잘라낼 수 있게 된 걸까.

이쯤에서 ‘팩트체크’가 필요하다. n번방 사건 청원은 본회의에 단독 부의되지 않았다. ‘디지털 성범죄’라는 측면에서 유사한 ‘딥페이크(deepfake)’ 처벌 관련 법안을 논의하고 있으니, 한꺼번에 처리하면 된다는 논리였다. 개정안에도 n번방 사건 청원의 본질은 반영되지 않았다. 보도와는 달리 개정 법률안은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한 편집물의 제작·배포·판매·임대 등 행위를 처벌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디지털 성범죄의 해법으로 지목되는 국제 공조 수사와 정책 등 압박 수단에 관한 언급도 부족했다. 딥페이크 처벌 근거가 마련되긴 했으나, 디지털 성범죄 전반을 해결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자는 청원 취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딥페이크 처벌 법안과 n번방 사건 청원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특정 기술을 활용한 범죄의 처벌 근거만을 포함한 딥페이크 처벌과 달리, n번방 사건 청원은 ▶국제 공조 수사 ▶양형기준 강화 ▶디지털 성범죄 전담부서 신설 ▶2차 가해 방지를 포함한 대책 마련 등 디지털 성범죄 전반을 뿌리 뽑기 위한 해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는 청원의 요점을 제대로 짚어내지조차 못했다. 상정 당일 회의록엔 ‘n번방 사건 잘 모른다’‘청원한다고 법 다 만드냐’ 등의 망언이 기록됐다.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여전히 ‘2등 시민’에 불과함을 방증한다. 국회가 사전에 n번방 사건에 대한 이해와 디지털 성범죄 해결에 관한 근본적인 고민도 거치지 않았으니, 개정 법률안에 n번방 사건의 핵심이 전부 누락된 것은 당연지사다. 그런데도 국회는 이번 개정 법률안이 ‘민의를 반영한’ 입법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주요 언론도 연신 ‘텔레그램 입법’이 이뤄졌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오로지 성과를 보이기에 급급해 졸속 입법에 불과한 개정 법률안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모양새다.

n번방 사건의 주범인 ‘박사’는 ‘텔레그램’ 채팅방뿐 아니라 어디에나 존재한다. 사안의 중대성과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여성 보호에 관한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 국회, 이러한 국회의 행태를 감싸고 돌며 민의를 왜곡하는 언론 역시 여성들의 삶에 있어선 또 다른 ‘박사’다. 한국여성단체연합·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는 이들을 비판하며 ▶불법 촬영물 삭제 불응 시 처벌 ▶성폭력 범죄 구성요건 확대 ▶‘온라인 그루밍’ 개념 규정과 형법상 처벌 근거 마련 등을 촉구했다. 국민의 봉사자인 국회가 국민 보호라는 기본 책무를 언제까지 저버릴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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