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용기야 I got yo back
너는 더는 두려워 않아도 돼
니가 느끼는 슬픔과 불안함은
모조리 다 내가 들이마셔 버릴 테니까
넌 마음 놔도 돼’*
지난 5월 청파제를 맞아 울려퍼진 목소리를 기억하는가. 그 목소리는 많은 숙명인에게 용기를 선물하고 격려를 안겨줬다.
지난 8월 목소리의 주인공인 슬릭(SLEEQ)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무대 위에서 랩으로 당당히 본인의 생각을 표현하던 그는, 무대 아래서 본지 기자를 만났을 땐 진솔한 목소리로 본인을 소개했다. 본지 기자는 슬릭을 만나 그의 이야기와 생각을 들어봤다.

슬릭, '어쩌다 래퍼'
그가 랩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그저 ‘해보고 싶어서’가 이유의 전부였다. 10대였던 슬릭은 대중에게 많이 드러나지 않은 문화를 좋아했고, 당시 힙합은 비주류 문화 중 하나였다. 슬릭은 “초등학생 때 처음 인터넷에서 힙합을 접하게 됐을 때 ‘나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라며 “그런 생각으로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다 보니 나중엔 음반도 내보고 싶고 공연을 해보고 싶은 욕심까지 생기더라고요”라고 본인의 경험을 털어놨다.
비주류 문화를 즐기던 한 10대의 도전은 래퍼 ‘슬릭’을 만들었다. 그는 “래퍼를 직업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한 번도 없어요”라며 “어쩌다 보니 해보고 싶었던 일들과 그 일을 해 볼 기회가 잘 닿아 랩에 관한 욕심을 계속해서 채워갈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러다 힙합이 유행하면서 9년째 래퍼로서 먹고 살게 됐네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활동명인 슬릭에도 ‘어쩌다 보니’를 반복하는 그를 닮은 역사가 존재한다. 그는 슬릭이 ‘대충 지은 이름’이라며 자신의 활동명에 얽힌 이야기를 늘어놨다. 그가 10대 후반이던 때, 국내에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랩 문화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래퍼로 활동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활동명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그때는 활동명으로 거창한 뜻이 담긴 영어 약자를 쓰는 게 유행이었어요”라며 “거창한 활동명을 며칠째 고민하던 도중에 ‘슬릭’이라는 발음이 갑자기 떠올랐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찾아보니 말재주가 좋다는 의미의 ‘Sleek’이라는 영어 단어가 있더라고요”라며 “마침 뜻도 마음에 들어 슬릭을 활동명으로 정하고 마지막 철자 k는 영어 단어 ‘Sleek’과 구분하기 위해 q로 변경했어요”라고 말했다.
슬릭은 음악에 늘 본연의 자신을 녹이려 노력한다. 그의 음악은 대중의 취향을 노려 만들어진 음악과 달리 그의 음악은 본인이 세상에 던지고 싶은 말과 느낌으로 가득 차 있다. 슬릭은 자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두 번째 정규앨범 <LIFE MINUS F IS LIE>를 꼽았다. 그는 “해당 앨범의 수록곡들엔 제 감정이 저만의 방식대로 담겨 있어서 곡이 나타내는 감정을 명료하게 설명하기가 어려워요”라며 “같은 앨범에 수록된 ‘HESITATION’이라는 곡은 사랑에 관한 내용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곡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해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음악을 통해 제가 표현하는 사랑과, 대중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인상이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덧붙였다.

음악으로 혐오에 맞서다
슬릭은 음악을 언어 삼아 성차별적 사회를 비판하기도 한다. 지난 2016년, 행정자치부가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별 가임기 여성 수를 보여주는 지도를 공개해 사회적 논란이 일었다. ‘가임기 여성지도’는 가임기 여성의 인구수를 지역별로 표시해 어느 지역에 가임기 여성이 얼마나 살고 있는지 수치로 나타낸다. 이에 슬릭은 ‘내꺼야’라는 곡을 발표해 여성의 신체적 자기결정권은 여성 본인에게 있음을 전했다. 내꺼야엔 ‘나라 출생률이 낮아 걱정된다면 말야, 그냥 애 키울 돈을 줘. 사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대놓고 말해, 내게 책임을 지운 걸’라는 가사가 있다. 음악를 통해 슬릭은 저출생 문제를 여성의 책임으로 전가하려는 국가와 행정자치부의 여성혐오적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슬릭이 여성 혐오를 비롯한 혐오에 맞서 싸우는 가장 큰 동인은 슬픔이다. 그가 이제껏 써 온 비판적인 음악 속의 피해자는 다름 아닌 슬릭 본인이다. 그는 “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이나 혐오에 크게 공감하곤 해요”라며 “보통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저 자신이다 보니 슬플 때가 많죠”라고 말했다. 그는 슬프고 무력할 때 음악으로 가장 강하게 저항할 수 있다고 말한다. 슬릭은 “저는 곡을 만드는 사람이니 할 말이 생기면 음악으로 보여줘야죠”라고 말했다.
그에게도 힘에 부치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는 무거운 사회 문제를 마주했을 때 우선 회피하고 싶다고도 털어놨다. 그는 “페미니스트이자 비건(Vegan)으로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혐오포현에 노출되곤 해요”라며 “부끄럽지만 당장의 스트레스가 두려워서 화내기보다 눈앞의 상황을 체념하는 경우도 많아요”라고 말했다.
최근 국내 힙합 문화엔 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슬릭은 “힙합 경연 프로그램이 유행하며 힙합계의 경쟁 구도가 더욱 견고해졌다고 생각해요”라며 “저는 그런 경쟁이 적성에 맞지 않아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괴로울 때가 많아요”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힙합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그분들은 경쟁이 과열된 분위기에 익숙해요”라며 “제가 추구하는 음악과는 많이 다르죠”라고 말했다.

철학적인 래퍼, 청중과의 공감을 꿈꾸다
슬릭은 힙합계의 과열된 경쟁 속에서도 자신만의 음악을 풀어나갈 방법을 늘 고민한다. 슬릭은 “제가 추구하는 대로 곡을 만들고 있는데 제 곡을 듣는 사람들도 이걸 좋아할지는 모르겠어요”라며 “매일 이런 고민에 시달리는데도 머리가 하얗게 세지 않은 게 신기하네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두터운 소비층이 자리잡지 않았다는 점 역시 그의 고민 중 하나다. 그는 “일반적인 힙합 문화 소비자 대다수는 여성 래퍼에게 기대하는 바가 같아요”라며 “그들은 여성 래퍼의 입으로부터 사랑 노래 혹은 여성 화자의 성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죠”라고 말했다. 하지만 슬릭의 음악은 본인에게 솔직한 이야기로 이뤄진다. 그는 “기대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제가 대중에겐 많이 생소한 것 같기도 해요”라고 말했다.
슬릭도 소비층을 공략하기 위한 곡을 만들기도 했다. 주로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가 곡의 주제였다. 슬릭은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에 관한 곡을 만들었을 때 관련 행사에 초청이 된 적이 꽤 있어요”라며 “특정한 음악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곡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최근에는 이런 방식에도 회의감이 들어요"라며 “무엇보다도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우선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슬릭의 목표는 섬세한 표현으로 청중의 공감을 사는 래퍼가 되는 것이다. 한 때 그는 시류를 앞서나갈 정도의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음악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은 청중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음악를 만들길 꿈꾼다. 그는 “전 평소에도 많은 고민을 해요”라며 “적어도 저와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이 공감할 수 있을 만한 가사를 쓰는 래퍼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본인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없다’고 답했다. 현재만으로도 고민이 많아 미래를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슬릭은 “저는 오늘 할 일만 하며 사는 사람이에요”라며 “사실 당장 내일 일정도 일정표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될 때가 많아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 그는 “나이가 든 내 모습과 지금이 다르길 원하지 않아요”라며 “힘이 닿는다면 짧은 미래든 먼 미래든 지금과 비슷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궁한 뒤에 교하게 된다’라는 격언이 있다. 예술가는 작품 제작 중 한계를 만났을 때 포기하지 않고 고민해 그 벽을 뚫어야만 비로소 좋은 작품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슬릭은 늘 본인의 음악의 발전을 위한 건강한 고민들을 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고민들을 창작의 양분 삼아 지금처 좋은 모습을 청중에게 계속 보여주리라 기대해본다.

 

*슬릭의 노래 'MA GIRLS' 중 일부 가사를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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