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행동하게 했다”
그 때 조선는…

오호통재라! 1905년 11월 18일, 일제는 을사오적을 앞세워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골자로 하는 을사늑약을 강요했다. 대한제국이 주권상실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이 늑약은 ▲조약 체결에 무력과 협박을 사용했고 ▲고종황제가 전권위임에 관한 명령을 내린 적이 없으며 ▲조약에 대한 황제의 비준서가 발부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제조약의 효력이 없다.


늑약 체결 이틀 뒤인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은 을사오적과 일제를 규탄하고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려 전국 각지에 항일항쟁을 불러일으켰다. 유생들은 항일상소운동을 벌이고 농민들은 의병조직에 가담했다. 이처럼 많은 국민이 목숨을 걸고 항쟁할 때, 고종 황제도 여러 가지 주권회복 투쟁을 했다.   


고종황제는 늑약이 체결되고 일본의 통감부 설치가 임박해지자 1906년 1월 29일 국서를 만들어 을사늑약 무효와 통감 파견 반대를 공식 선언했다. 또한, 이 늑약이 무효임을 미국, 독일, 러시아 등 세계열강에 통고했다. 1907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이상설, 이준, 이위종으로 구성된 특사를 헤이그에 파견했다.  헤이그 특사는 힘없이 무너지는 조국을 뒤로하고, 언제 꺼질지 모를 조국의 목숨을 이어가고자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제국주의 열강이 막아섰다”
그 때 세계는…

만국평화회의의 ‘만국’에 조선과 같은 약소국은 포함되지 않았다. 제국주의 시대의 평화는 열강들에게만 허락된 것이기 때문이다. 열강은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약육강식의 세계질서를 합리화했다. 또한, 열강들끼리는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같이 서로의 식민지를 인정하는 조약을 맺어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이들은 약소국의 피해는 철저히 외면하면서 자신들의 이익만 관철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제체제에서 만국평화회의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고, 헤이그 특사의 사명 또한 성공할 수 없었다.


결국, 헤이그특사는 일본의 방해, 미국의 방조,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의 선회로 회의석상에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왜 조선이 이 회담에 참여하지 못하는가? 이는 조약이 처음부터 오염됐기 때문이다.” 만국평화회의의 한 소식지에 실린 이위종의 말에서 당시 국제사회의 부당함이 전해진다. 헤이그특사는 제국주의 열강의 방해 속에 쓸쓸히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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