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한 도심지의 대표 격인 서울 중구, 청계천과 동대문 패션거리 명동 거리 등 화려함으로 무장한 이곳에는 민족의 아픈 근대사를 지니고 있는 덕수궁 중명전도 있다. 중명전은 노예조약과 다름없는 을사늑약 체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결정과 이에 따른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 등 근대사의 손꼽히는 비극이 벌어진 곳이다. 뿐만 아니라 1925년에는 화재로 외벽만 간신히 남았고, 광복 후에도 무관심으로 방치돼 건물의 용도와 소유주가 수시로 변경되고 심지어 사설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등 시련을 겪어왔다. 다행히 최근 문화재청의 매입 이후 사적 제124호 덕수궁 안에 중명전이 추가 편입되는 등 중명전에 대한 관심이 돌아오고 있다.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의 중명전(重明殿)은 초기 황실도서관의 용도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Seredin Sabatin)이 설계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벽돌조 건물에서 ‘서양 느낌이 난다’ 했더니 우리나라 근대건축의 가장 초창기 풍모라는 건축적 의의도 지니고 있다.

중명전이 본래의 위상을 찾아가며 지난 7월 14일부터 9월 2일까지 이곳에서는 헤이그 특사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도 열렸다. 기획전을 보면 대한민국을 집어 삼키려는 일본의 야욕과 이에 맞서는 국민들의 저항이 생생히  느껴진다. 조선폭동기, 평양대격전도 등 일제의 조선침략을 미화한 그림들도 눈에 띈다. 러일전쟁 전황을 붉은 점으로 표시한 조견일로전쟁지도에서는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됐고 일본의 영토도 지나치게 크게 묘사됐다.

을사늑약의 슬픔으로 자결을 택한 민영환의 유서도 전시됐다. 자신의 빛바랜 명함 6장의 앞ㆍ뒷면에 이천만 동포와 외국의 공관들에게 빽빽이 써넣은 염원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의병장 고광순 부대가 사용하던 태극기에 쓰여진 ‘不遠復(불원복)’이라는 붉은 글씨 역시 ‘머지않아 다시 (국권을)회복하리라.’는 구국의지의 표현이다.

헤이그특사 파견을 다룬 방에서는 그들의 이동 경로를 정리한 그림이 가장 먼저 보인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 대륙을 횡단한 힘겨운 여정. 그들은 어떤 기분으로 이 길을 밟았을까.

특사단의 일원인 이위종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그들의 신념을 전해준다. 만국평화회의보의 ‘The Skeleton of the Party(축제의 해골)-대한제국 이위종과의 인터뷰’라는 기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헤이그에 있는 법과 정의의 신이 있는 제단에 우리의 호소를 올리고 그 조약이 국제법상으로 유효한 것인지의 여부를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의 최고중재재판소가 어디 있습니까?” 만국평화회의의 네덜란드 수석대표 드 보퍼르의 일기에서 이위종은 프랑스어가 유창한 지식인으로 묘사돼있다. 실제 이위종은 영어ㆍ불어ㆍ러시아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했다. 울분을 참지 못해 자결한 이준의 사망진단서에는 원인이 없이 사망 시각과 장소만 간략히 기재돼있다. 자국의 독립을 위해 뛰다 목숨을 다한 이들의 숨결이 중명전에는 여전히 생생하다.

지난 2일 막을 내린 전시를 끝으로 중명전은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리ㆍ복원 작업에 들어간다. 중명전이 새 모습을 찾는 날에 역사의 아픔도 순국선열의 넋도 새로운 광명으로 환하게 비춰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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