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강원도로 학술기행을 떠났다. 뜨겁게 비추는 햇볕 속에서 바다는 유난히 반짝였고, 경포대 위에서 마주한 바람은 참 시원했다. 학생들은 곳곳을 방문할 때마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영상이 곧 SNS를 타고 퍼져나갈 이들의 여행기가 될 터이니 더욱 그러했으리라.

지금으로부터 약 240년 전인 1780년 음력 5월, 연암 박지원은 압록강을 넘어 연경을 거쳐 열하로 길을 떠났다. 삼종형 박명원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청 황제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사행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6개월의 긴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장에 담긴 것은 벼루와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장, 공책 네 권, 노정을 적은 이정록(里程錄) 한 축이 전부였다. 마치 처음부터 여행 내내 마주한 모든 것을 기록하리라 마음먹은 것처럼 그의 행장에는 종이와 붓 등만이 채워져 매우 단출했다. 연암은 박명원의 개인 수행원이었기에 공무(公務)에 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청나라의 이모저모를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보고 들은 것, 경험한 것을 메모하여 후에 이를 『열하일기(熱河日記)』 로 엮었다.

『열하일기』에는 연암의 시선에 사로잡힌 청나라의 풍경이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져 있다. 연암은 여정 속에서 마주한 명승고적과 수레, 벽돌, 환술, 코끼리 등 청나라의 다양한 문화 산물을 마치 사진으로 찍은 듯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그 안에 틈틈이 주변인들과의 대화를 삽입하고 재구성하여 각각의 순간을 현장감 있게 전달한다. 때문에 다채로운 문체와 구어적 표현이 섞인 그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240년 전의 청나라의 풍경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연암의 시선은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그의 시선은 산해관, 만리장성, 유리창, 황성, 동악묘와 같은 명승고적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민가(民家)의 창문, 기둥, 현판, 벽돌이나 깨진 기와로 모양을 낸 담 등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도 시선을 모은다. 그 과정에서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간과할 수밖에 없는 청나라의 미시적인 부분들이 조명된다. 또한 연암은 말몰이꾼이나 역관, 하인, 상인, 점쟁이, 거지 등 사회의 주변부에 존재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이들과 조우하며 겪은 일화를 수록하면서 그 안에 학문과 삶, 세계에 대한 통찰과 닫힌 세계에 대한 전복적인 사유를 유머와 함께 녹여낸다.

『열하일기』에는 시화, 기문, 잡록, 필담, 소설 등 여러 문체가 혼재되어 있다. 연암은 여정에 따른 일기를 서술하는 틈틈이 시화나 잡록을 통해 청나라의 시와 문장, 학문을 소개하고, 천하의 형세와 정세, 역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중국인들과 나눈 필담을 재구성하는 한편, 기이한 문장이나 비문, 소설 등을 베끼거나 발췌해 넣음으로써 독자의 흥미를 돋운다. 이를 통해 『열하일기』가 단순히 청나라의 견문을 기록한 여행 감상기가 아니라 정보의 보고이자 참신하고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수용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연암은 여행길의 문턱에서 압록강을 건너며 역관 홍명복에게 묻는다.

“그대 길을 아는가?[君知道乎]”

그리고 대답한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강과 언덕) 그 사이에 있다네.[道不他求 卽在其際]”

연암은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예리하게 파악하며, 북벌이 강조되던 사회에서 북학을 주장하고 새로운 관념과 인식의 필요성을 외쳤다. 그리고 생동감 있는 표현, 참신한 소재와 발상으로 문체 혁신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열하일기』는 이와 같은 연암의 사유와 인식이 총망라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안에는 여기와 저기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그 경계 언저리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던, 연암의 열망과 포부가 담겨져 있어 주목할 만하다.

이제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열하일기』를 읽어보자. 영상 너머에 존재하는 현실 공간,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선현 한국어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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