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란 ‘새로운 소식’이라는 의미로 사건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사건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당사자 자신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뉴스는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진행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여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쉽게 전달해주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CBS ‘김현정의 뉴스쇼(이하 뉴스쇼)’를 진행하는 라디오 PD(Program Director, 이하 피디) 김현정(여·42) 씨다. 그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인터뷰에 응하도록 만들고, 쉽고 정확한 언어로 대중들에게 사건을 전달한다. 그의 무엇이 사람들을 이끌었을까. 본지 기자는 지난달 14일(목)에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서울특별시 목동에 위치한 CBS 편성국에 방문해 그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변화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현정의 뉴스쇼 입니다"
김 피디는 항상 한 발짝 앞서 변화를 선도했다. 중년 남성의 교수로 규격화됐던 기존의 진행자 상에 해당하지 않았던 그는 본인의 특색으로 자신만의 분야를 개척해나갔다. 그가 라디오 방송인 뉴스쇼의 진행을 맡게 된 건 아주 우연한 기회 때문이다. 라디오 피디로 일할 당시 진행자의 부재 때문에 임시로 오프닝 멘트를 맡았던 사건을 계기로 이후 방송국 개편 때 진행자로 발탁된 것이다. 그는 “당시 국장님께서 제 목소리가 시사 프로그램에 잘 어울린다고 말씀해주셨죠”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사회에서 얻는 대부분의 기회는 우연히 찾아오는 것 같아요”라며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준비됐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김 피디는 뉴스쇼를 통해서 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2011년 6월 1일(수)에 뉴스쇼에서 방송된 ‘노우빈 훈련병의 아버지 노동준 씨 인터뷰’가 대표적이다. 당시 그는 최초로 노 훈련병 아버지인 노동준 씨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노 씨와의 진정성 있는 인터뷰는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군 의료 체계 전면 개편’이라는 변화를 이룩했다. 그는 “저희 팀은 ‘대중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이야기를 가장 듣고 싶은 사람을 통해 가장 쉬운 언어로 전달한다’는 원칙이 있어요”라며 “이러한 원칙 아래 인터뷰를 진행하고 이 인터뷰로 사회에 변화가 실현될 때만큼 보람을 느낀 적이 없죠”라고 덧붙였다.

김 피디는 또 다른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바로 ‘김현정의 뉴스쇼 별책부록’이라는 이름 아래 ‘김현정의 댓꿀쇼(이하 댓꿀쇼)’라는 유튜브(YouTube) 1인 방송을 지난해 11월부터 시작한 것이다. 라디오 방송과 뉴미디어인 유튜브의 결합은 라디오 업계에선 최초였다. 그는 유튜브 방송을 시작한 계기에 대해 “라디오 방송은 시간 제약 때문에 청취자들의 모든 사연을 다 읽을 수가 없어요”라며 “여러 사연들을 청취자들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싶어서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죠”라고 설명했다. 해당 채널은 시작한 지 약 5개월 만에 구독자 수가 대략 10만 명을 돌파했다. 그는 “다른 언론사들에게 댓꿀쇼 관련 문의도 많았어요”라며 “그만큼 우리 방송이 업계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 같아 뿌듯했죠”라고 덧붙였다.

변화의 중심이 된 김 피디의 모습 이면에는 그의 쉴 틈 없는 일상이 있었다. 그는 진행자의 업무뿐만 아니라 제작자의 업무에도 참여한다. 이에 그의 하루는 새벽 3시 30분부터 시작된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방송을 하고 피디들과 함께 주제회의, 원고 준비 및 작성 등 라디오 진행에 필요한 전반적인 작업을 마치면 하루가 훌쩍 지나요”라며 웃으며 이야기했다. 실제 본지 기자가 편성국에 도착했을 때도 그는 다른 피디들과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삶의 주파수를 켜다
김 피디는 뉴스쇼의 진행자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CBS ‘조규찬의 꿈과 음악 사이에’의 피디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라디오 피디의 꿈을 꿨던 그는 “저는 단 한 번도 꿈이 바뀐 적이 없어요”라며 “지금도 라디오 피디인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요”라고 말했다. 

뉴스쇼 진행을 맡게 된 후에도 라디오는 언제나 김 피디의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는 “쉴 틈 없이 뉴스쇼를 진행하며 지쳐있던 때 라디오 피디로 완전히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적도 있었죠”라며 “그렇게 10개월간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다시 뉴스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얻었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때가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죠”라며 “물론 사람은 전력질주를 해야 하지만 지칠 때에는 쉬면서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언제나 라디오와 함께했던 김 피디가 말하는 라디오의 매력은 무엇일까.

김 피디의 학창 시절은 라디오와 함께였다. 지금처럼 다양한 매체가 없었던 시절 유일하게 그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유일한 창구는 라디오였다. 그는 매일 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고 디제이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라디오의 디제이가 ‘오늘 하루 어떠셨나요?’라고 물으면 그 사람과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었죠”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어 김 피디는 라디오의 아날로그적 매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라디오는 요즘 매체와는 다르게 음성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다양한 상상이 가능한 매체예요”라며 “그 속에는 인간의 스토리가 담긴 휴머니즘이 깃들어져 있고 그래서 숨소리까지 귀 기울이게 하는 매력이 있죠”라고 말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요"
김 피디는 아들과 딸을 둔 워킹맘(Working Mom)이다. ‘엄마’로서의 삶과 사회생활을 함께하는 것은 힘들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그는 남다른 각오를 다졌다. 그는 “한국 사회는 결혼한 여성이 일하기 쉬운 사회는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이어 “기혼 여성이 온전히 자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여성이 온전히 자기 인생을 희생해야 하죠”라며 “저는 친정어머니의 도움 덕분에 온전히 일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라고 덧붙였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고 극복해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는 “세상은 빨리 변하지 않아요”라며 “열심히 일하고 소위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는 여성들이 많아져서 뒤따라오는 후배 여성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수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조언도 했다. 

이어 김 피디는 본인의 꿈을 이룬 사회 선배로서의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현시대가 취업이 어려워서 청년들이 매우 힘들어하는 것을 이해해요”라며 “사회에 먼저 진출한 선배로서 미안하고 안타깝죠”라고 말했다. 이어 “저희 세대가 취업난이 시작된 1 세대 었어요”라며 “그렇지만 자신의 꿈이 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바로 포기하지 않길 바라요”라고 조언했다. 그는 원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 준비하던 자신만의 방법을 소개했다. 그는 “희망하는 직업을 3순위로 피디, 기자, 광고로 정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대학교 때부터 준비했어요”라며 “학교 방송국에서 활동하고 광고 회사 인턴도 했었죠”라고 말했다. 또한 “대학교는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예요”라며 “그래서 최대한 고개를 들고 세상을 보길 바라요”라고 덧붙였다. 

김 피디는 숙명여대에 다니던 친구가 떠오른다며 본교 학우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참 팍팍한 세상이죠. 하지만 주저앉아 투덜댄다고 바뀌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즐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주어진 모든 상황을 즐기며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다보면 그것이 ‘내공’이 됩니다. 내공을 단단하게 키워가며 언젠가 자신에게 찾아올 ‘때’를 준비하세요. 그 ‘때’는 분명히 옵니다. 절대 지치지만 마세요.”

 

그렇게 그와의 인터뷰가 마무리됐다. 
그는 라디오를 해당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사람들의 ‘숨’이 깃든 매체라고 표현한다. 그가 말한 것처럼 라디오는 많은 사람의 노고와 인생이 담긴 매체이다. 그는 지금도 ‘숨’이 깃든 프로그램을 만들며 사회를 한층 더 활기차게 만들고 있다. 매일 아침 따뜻하지만 속은 단단한 그의 뉴스와 함께 시작하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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