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의 사람들(3)]

박자혜(朴慈惠, 1895-1943)는 단재 신채호의 부인으 로 더 알려졌지만, 자신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 은 독립운동가이다. 그녀는 경기도 고양의 중인 집안에서 출생,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가 나라 가 무너져 가던 시기에 10년 가까이 궁녀로 살았 다. 1907년에 황태자 이은(영친왕)이 일본에 볼모 로 유학을 가자 근대교육을 받은 궁녀가 필요해져 서 순헌황귀비가 세운 ‘명신여학교’에 궁녀를 입 학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학교의 이름이 ‘숙 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바뀐 1914년에 기예과 3 년 과정을 마치고 제2회로 졸업했다. 당시 기예과 에서는 조선어, 일어, 산술 등과 함께 양재, 재봉, 편물, 자수 등 여성에게 요구된 기능을 가르쳤다.

나라가 망하여 궁녀도 사라졌으므로 기예과 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자립하기 어려워 그녀는 다시 조산부양성소에 다녔다. 전통적인 여성 법도가 몸에 밴 궁녀가 생리학, 간호학 등 을 익혀 전문 의료인 대접을 받는, 당시 여성 의 새로운 직업인 조산부가 된 것이다. 그녀 가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 간호부로 취업 해 3년여를 근무한 1919년에 삼일운동이 터졌다.

삼일 운동이 계속되는 동안, 병원에는 무자비한 진압으로 다친 환자가 줄을 이었다. 박자혜는 조선인 간호부들을 규합하여 ‘간우회’를 조직하 고 동맹파업을 비롯한 여러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더 이상 독립 운동을 하기 어려움 을 깨닫고 망명을 결심, 중국행 기차에 몸을 실었 다. 그녀는 만주의 봉천(선양)에서 정미소를 경영 하는 우응규를 찾아가 노자와 추천서를 받고 다시 북경으로 가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했다. 거기서 여학생 축구부를 만들 정도로 그녀는 활달했다.

북경에서 1년여를 지낸 1920년 봄, 독립운동가들 이 우당 이회영의 집에 자주 모였는데, 거기에는 언론인이자 학자로 이름 높은 신채호(1880-1936)도 있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가 윌슨대통령에게 위 임통치청원서를 보낸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자 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걷고 있었 다. 당시 25세의 박자혜는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의 중매로 ‘가정에 등한해도 섭섭해 하지 말라’는 이 40세의 독립운동가와 결혼하고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나라 잃은 백성의 결혼은 또 다른 고난 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가장 없는 가정을 책임져 야 하는 여성에게 더 혹독했다. 첫째 아이를 낳으면서 학업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신채호가 오 로지 독립운동에만 힘쓰기에 살림조차 어려워져 서 박자혜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1922년에 귀국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인사동에 간판을 걸고 산파업을 했지만, 딸이 영양실조로 숨지는 극도의 궁핍과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 속에 살았다. 그러나 남편의 저술을 위해 자료를 보내는 한편 독립 운동을 계속, 국내에서의 연락과 안내역을 맡았다.

1936년 2월, 신채호가 8년째 갇혀 있던 형무소 에서 그가 죽어간다는 전보가 왔다. 박자혜는 여 순(뤼순)으로 달려갔지만 남편은 처자식을 알아 보지 못한 채 곧 숨졌다. 1943년 10월, 그녀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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