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의 사람들]

박화성(朴花城 1903-1988)은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이바지한 작가로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일생 동안 총 80여 편의 장편 및 단편 소설을 발표하였다. 전남 목포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만 11세에 자신의 필명이 된 아호를 지었다. 본명은 박경순(朴敬順)이다.

박화성은 1916년에 목포에서 상경, 숙명 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풍금을 잘 친 그녀는 학교 풍금실에서 근대문학 최초의 여성 문인으로 일컫는 김명순(제8회)을 만났다. 순헌황귀비가 세운 까닭에 당시 학생들은 황실 행사에 자주 참석했는데, 박화성은 1918년 1월에 황태자 이은이 잠시 귀국했을 때 교정에서 열린 학예회에서 풍금을 연주하였다.


1918년 3월에 숙명여고보를 졸업(제9회)하고 일본의 상급 교육기관에 유학할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려워지자 1921년에 전남의 영광중학원 교사로 부임, 거기서 시조시인 조운의 도움을 받으며 문학 공부를 하였다. 1925년에 단편소설 「추석 전야」가 『조선문단』 에 수록됨으로써 작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방직공장 여공의 고통을 다룬 이 소설은 당시에 일어난 ‘경향파’ 즉 계급문학의 조류에 따른 것이었다. 이 해 3월에 새 학제에 따라 숙명여고보 4학년에 재입학하고 다음 해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제17회).


마침내 1926년 4월에 오빠 친구의 도움으로 일본여자대학교 영문학부에 입학하였다. 이때 근우회 동경지부장을 하는 등 사회주의적 학생 활동을 열심히 하였으나, 학비가 끊겨 3학년에 진급만 하고 귀국하였다. 이 무렵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김국진과 결혼을 했는데, 그 반지에는 ‘사랑과 이즘에 충실하자’고 새겼다. 사상운동을 하다 갇힌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1932년에 중편소설 「하수도공사」로 추천을 완료하였고 역사소설  『백화』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이 작품은 백화라는 고려 시대
기생이 주인공인 ‘가련한 여인 이야기’인데, 여성이 쓴 최초의 장편소설로 간주된다.


박화성은 이후 약 5년간 「비탈」 「고향 없는 사람들」 『북국의 여명』 등 여러 주목받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탄압과 자연 재해에 시달리는 노동자, 농민의 고통을 드러내고 이념성이 강한 지도적 인물을 내세워 현실을 비판하는 경향을 띠었다. 그래서 당시에 강경애와 함께 좌익적 ‘동반자 작가’로 분류되었다. 여기에는 타협을 모르는 투쟁가였던 남편과 오빠 박제민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박화성의 문학세계는 매우 변한다. 1950~1960년대에 신문과 잡지에 소설을 잇달아 연재하는 인기 작가였고 만년까지 활동을 계속했으나, 이전의 사회적 문제의식은 찾기 어렵다. 그녀는 해방 전에는 선민의식이 강한 진보적 신여성의 삶을 살았고, 이후에는 여성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룬 여성 작가로서 주목되는 인물이지만, 『박화성 문학전집』 총20권을 편찬한 평론가 서정자의 지적처럼 “사실주의자라기보다 이상주의자”에 가까웠다. 지금 목포문학관 1층에는 박화성관이 있다.                    

최시한(숙명역사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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