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약자들에게 힘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예원(여·34) 변호사다. 지난 1월 장애인권법센터를 개소한 김 변호사는 자신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받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같이 의논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죠”라고 말하며 부당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딘다. 본지는 김 변호사의 따뜻한 마음을 함께 나누기 위해 그녀를 만났다.
 

도전 끝에 얻게 된 변호사의 삶, 약자의 편에 서다
두 번의 도전 끝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김 변호사는 망설임 없이 ‘변호사’라는 직업을 택했다. 범죄 여부를 알아내고 피의자를 기소하는 검사보다는 누군가의 편이 돼 돕는 역할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태어날 때 의료사고로 한쪽 눈을 잃어 장애를 갖게 됐다. 하지만 장애는 김 변호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김 변호사는 “장애는 오히려 사건의 당사자와 연대하거나 *라포르(rapport) 형성에 도움이 됐어요”라며 웃음을 보였다.

어릴 적부터 법과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던 김 변호사가 꿈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대학교에 입학한 김 변호사는 “어린 동생들까지 돌봐야 했기에 대학을 다니는 것이 힘들었어요”라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법무부 사법시험(이하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이 김 변호사에게는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하루에 16시간씩 공부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해야만 했다. 김 변호사는 “첫 번째 사법시험에서 1차 시험에 합격했어요”라면서 “너무 자만해서 결국 2차 시험은 떨어졌죠”라고 말했다. 이어 “두 번째 사법시험은 다시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준비했고 마침내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어려운 시간을 거쳐 법조인이 된 김 변호사에게 변호사는 천직이었다. 김 변호사는 “학생 때부터 제 주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노력했어요”라며 그녀의 성격이 변호사 일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주변에 경찰차가 있으면 관심을 갖고 다가가 어떤 일인지 살피곤 했다. 혹시라도 억울한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주위에 관심이 많은 제 성격이 다른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변호사로 만들어준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공익변호사 김예원,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다
김 변호사는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만든 ‘재단법인 동천’의 공익활동을 전담하는 변호사가 됐다. 공익 변호사가 된 그녀는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약자 중에서도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재단법인 동천에서 일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애인 사망과 관련된 큰 사건을 맡았다. 김 변호사는 “그 사건을 맡으며 장애인의 인권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라며 장애인의 인권을 전문적으로 보호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장애인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김 변호사에게 희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서울특별시 장애인인권센터’가 설립된 것이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서울특별시 장애인인권센터로 이직했다. 김 변호사는 “제게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억울한 일을 당한 장애인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서울시 장애인인권센터에서 일하던 3년 동안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도 받았다.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공부였지만 공부를 하며 김 변호사는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변호사는 “서울특별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장애인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싶었어요”라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 여성과 장애 아동을 직접 찾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죠”라고 말했다. 발달장애가 있거나 성폭력에 노출된 장애 여성과 장애 아동은 도움을 요청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김 변호사는 직접 ‘장애인권법센터’를 개소했다.

일정한 월급을 보장받을 수 없고 법률사무소로서 후원금을 받을 수도 없는 장애인권법센터는 김 변호사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한편으론 불안했던 김 변호사였지만 배우자의 적극적인 지지에 용기를 얻어 장애인권법센터를 열 수 있었다. 김 변호사는 “가족 모두 장애인권법센터를 설립하는 것이 가치 있고 옳은 일이라며 지지했어요”라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부당함을 없앤 빈자리, 희망으로 채우다
김 변호사는 “장애인은 아동이나 노인 등 다른 소수자들에 비해 인권 향상을 위한 운동에 적극적이에요”라며 “우리나라의 장애인 인권 향상을 위한 역동적인 움직임은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죠”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 인권의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며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 인권이 보장되기 위해 가야 할 길이 멀다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일상적인 생활에서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 설명했다. 시각장애인이 온라인 쇼핑을 할 때도 기본적인 권리는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청각적인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도록 돼 있지만 실제로 대체 텍스트를 첨부하는 사업자들은 많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이어 “시각장애인의 온라인 쇼핑권이 원천 봉쇄돼 있는 거죠”라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의 간격이 넓으면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지하철 승·하차에 큰 불편을 느낄 수 있어요”라며 장애인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시설에 아쉬움을 표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애인권법센터를 세워 장애인 권리 옹호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장애인권법센터에서 장애인 인권 교육을 진행해 비장애인들이 갖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사건에 적극적으로 법률 조언을 하며 소송을 지원했고,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법조항은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2014년 ‘의족사건’이라고 불리는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된 사건은 김 변호사가 진행한 적 있었다. 한쪽 다리가 의족인 장애인 근로자가 일을 하다 양쪽 다리를 다쳤지만 의족인 다리는 신체가 아니라며 산재처리를 거부당했다. 김 변호사는 이 사건을 1심과 2심 모두 패소한 상태에서 수임하게 됐다. 분명히 두 다리 모두 근로에 꼭 필요한 것인데 한쪽은 몸에 붙어 있지 않은 의족이라는 이유로 산재를 거부당한 것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생각한 김 변호사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다행히 대법원은 김 변호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장애인 근로자의 의족도 신체의 일부로 봐 의족 파손에 대한 산재처리를 거부한 것이 위법하다고 2심을 파기 환송했다.

김 변호사는 국회에 장애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법 조항에 대해 의견서를 보내 부당한 법을 고쳤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은 1종 운전면허시험에 응시조차 할 수 없었어요”라며 “그런 부당한 법을 고치기 위해 6년이 걸렸죠”라고 말했다. 장애인에 대한 부당함을 없애기 위한 김 변호사의 노력이 앞으로 인권을 침해당할 뻔한 불특정 다수의 인권 향상을 가져온 것이다.


억울한 누군가의 편이 돼 그 사람의 목소리를 함께 내주고 싶다는 김 변호사는 지금도 누군가의 손을 잡고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김 변호사는 변호사를 꿈꾸는 학우들에게“변호사 일을 할 때 필요한 글쓰기, 말하기 등의 능력적인 부분은 시간을 투여하면 돼요”라고 하면서도 “사건 당사자를 만나서 대화하며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라고 조언했다.

“길을 열어드리는 거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김 변호사는 피해자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하지만, 자신의 역할은 그저 그들이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존중받지 못하는 장애인의 인권을 위해 싸우며 피해자가 자신의 상처를 딛고 점점 삶의 활력을 얻어갈 수 있도록 희망을 전하고 있다.

*라포르(rapport): 주로 상담, 교육, 치료 등의 분야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상호 신뢰, 공감 등으로 이뤄진 두 사람간의 관계를 뜻한다.

▲ 지난1월 장애인권법센터를 개소한 김예원(여·34) 변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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