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양적으로도 활발한 교역국이자 서로에게 중요한 무역 파트너이다. 한중 교류는 기원전 3,4세기에 한자가 전래되면서 시작됐다. 한자의 보급으로 중국의 서적을 읽을 수 있게 된 우리 민족은 유ㆍ불ㆍ도교의 관련 서적을 수입해 더 많은 중국문화를 받아들였다.


이후 양국의 교류는 국가와 민간에서 모두 행해졌다. 810년 경, 신라 장군 장보고는 당나라에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인 신라방을 건설해 재래시장을 형성하고 무역제도를 정착시켰다. 11세기 말에는 고려의 친송정책과 송의 거란견제정책으로 양국의 친밀도가 높아졌다. 이 시기를 전후해 송 상인의 내항횟수는 고려 현종 3년(1012)부터 충렬왕 4년(1278)까지 약 120여 회에 이르렀고, 내항한 송 상인의 총인원은 약 5천 명에 달했다. 조선 말 청나라의 기술 도입을 주장한 북학파의 역할도 한중교류에 일조했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은 청나라의 선진과학기술을 배운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토대로 정약용, 성해응 등의 학자들은 청의 문물 뿐 아니라 청의 학술인 고증학과 예술까지도 받아들였다.


중국과 벌였던 크고 작은 전투도 양국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살수대첩, 안시성전투, 병자호란 등의 전쟁 중에는 군사 간 또는 군사와 양민 간의 교류가 발생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승리국이 전쟁포로와 볼모, 전리품 등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교류가 일어났다. 특히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뒤에 효종)이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 청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한 것이 유명하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뒤에 청의 신문물을 소개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활발했던 한중 교류는 20세기 초 일본의 한반도 및 중국 대륙 정복과 2차 대전의 냉전 상황으로 반세기 이상 단절됐다. 그리고 1973년 우리나라의 공산권 문호개방을 원칙으로 한 6ㆍ23선언과 1978년 중국의 실용주의 노선에 기초한 대외개방정책으로 양국의 교류가 재개됐다. 88올림픽 이후 1991년 양국 간에 무역대표부가 설치됐고 1992년에는 정식수료가 이뤄짐에 따라 양국 간의 교역이 가파르게 증가했다.


중국은 2003년 이후 우리나라의 수출상대국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2004년 이후부터는 수입상대국 2위가 됐다. 올해는 한중 교류가 정식으로 이뤄진 지 15년을 기념하는 ‘한중 교류의 해’로 다양한 행사가 양국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 행사를 통해 한국과 중국이 더욱 가까이 묶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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