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조부모와의 추억이 가슴 속 한편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여름방학에 시골에 있는 조부모 집에서 수박을 먹었던 기억, 바쁜 부모를 대신해 꽃다발을 들고 학예회에 참석한 조부모와 눈이 마주치자 환히 웃었던 기억. 조부모의 따뜻한 사랑에 누군가는 부모의 사랑과는 또 다른 특별함을 느낀다.

숙명인에게 있어서 조부모는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일까. 어버이날을 맞이해 본지는 지난 2일(화)과 4일(목) 이틀간 숙명인 617명을 대상으로 ‘숙명인과 조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설문조사를 시행했다. 기사에는 전체 응답자 617명 중 현재 조부모가 있다고 답한 560명의 학우가 작성한 답안만 인용됐다. (정확도 95%, 오차범위 ±1.8%p)

조부모와 만남·연락 횟수 적은 숙명인
설문 결과, 숙명인은 일상생활에서 조부모와의 교류가 적었다. 절반에 가까운 숙명인이 명절과 같은 기념일에만 조부모를 만났다. ‘조부모와의 만남 주기’를 묻자 ‘조부모와 함께 살고 있지 않다’고 답한 91.62%(514명)의 학우 중 47.86%(246명)가 ‘명절 등 특별한 날에만’ 조부모를 만난다고 답했다. 양수빈(성악 17) 학우는 “조부모님이 지방에 살고 계셔서 명절이 아니면 찾아뵙기 힘들다”고 말했다. 조부모와의 물리적 거리가 만남에 어려움으로 작용한 것이다. 반면 조부모와 가까이 사는 류현지(홍보광고 17) 학우는 “십 분 내로 갈 수 있는 위치에 조부모님이 살고 계시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나 식사를 함께한다”고 말했다.

학우들은 조부모와 얼마나 자주 연락을 하고 있을까. ‘조부모와의 연락 횟수’를 묻자?49.02%(252명)의 학우가 ‘거의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 달에 한 번 내외’를 택한 학우가 21.79%(112명), ‘석 달에 한 번 내외’를 택한 학우가 12.26%(63명)로 뒤를 이었다. ‘하루에 한 번 이상’을 선택한 학우는 1.57%(8명)뿐이었다. 외할머니와 매일 연락한다는 윤채아(아동복지 16) 학우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자신을 돌봐준 외할머니를 각별하게 생각한다. 윤 학우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감사하다”며 “외할머니를 떠올리면 애틋한 감정이 들어 자주 연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만나고 연락하는 횟수는 적지만 학우 대다수는 자신이 조부모와 친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응답자 560명 중 79.28%(444명)의 학우가 본인이 ‘조부모와 친밀하다’고 느꼈다. 숙명인이 느끼는 조부모와의 친밀도는 5점 만점에 평균 3.23점이었다. 가장 높은 점수인 ‘5점’을 선택한 김지민(의류 17) 학우는 “조부모님과 친구같이 친밀한 사이다”며 “친구처럼 대화가 잘 통한다”고 말했다. 반면 김영은(한국어문 17) 학우는 “외할머니 댁에 방문해도 외할머니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며 ‘1점’을 선택했다.

이처럼 조부모와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학우도 있었다. 전휘주(교육 17) 학우는 친할머니와의 만남이 편하지만은 않다. 친할머니의 과도한 남아선호사상 때문이다. 전 학우는 “친할머니는 여성 교육의 목적을 성공적인 결혼이라고 생각한다”며 “내가 대학에 입학하자 남자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기도 했다”고 말했다.

조부모와의 관계가 소원한 이유로 가정사를 들기도 했다. 조부모와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다고 답한 익명의 학우는 “친조부모님과는 아예 연락하지 않는다”며 “양아버지이기 때문에 친조부모님과의 교류는 적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부모 부재’ 채우는 조부모의 사랑
숙명인에게 조부모는 또 다른 부모였다. 조부모는 혼자 학교에 가고, 혼자 놀이터에서 놀던 숙명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숙명인 과반이 어린 시절 조부모와의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조부모와의 특별한 경험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52.50%(294명)의 학우가 ‘있다’고 답했다. 학우들은 조부모와의 소중한 순간에 대해 저마다의 경험을 늘어놓았다. 김나현(미디어 15) 학우는 “외조부모님 댁 근처 강이 겨울이면 꽁꽁 얼곤 했다”며 “초등학생 때 외할아버지가 비료 포대와 노끈으로 만든 썰매에 나와 동생을 태워주셨다”고 말했다. 김 학우는 “외조부모님 댁에 방문해 당시 사진을 볼 때마다 그때가 그립다”며 조부모와의 추억을 회상했다.

바쁜 부모의 자리를 사랑으로 채워준 조부모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학우도 있었다. 조부모는 손녀가 자칫 혼자 보내야 했을 시간을 더욱 많은 경험을 하고 정서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으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

부모의 맞벌이로 인해 이수빈(한국어문 17) 학우는 어린 시절,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다. 놀 거리가 많지 않은 시골에서 심심해하는 이 학우를 위해 그녀의 외할머니는 어린 이 학우의 손을 잡고 뒷산에 오르곤 했다. 이 학우는 “외할머니와 함께 산에서 도토리와 은행을 주웠던 시간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이성희(정치외교 17) 학우의 조부모는 바쁜 부모를 대신해 손녀를 데리고 박물관이나 전시회를 자주 찾았다. 이 학우는 “외조부모님에게 내가 첫 손녀였기 때문에 나를 유독 예뻐하셨다”며 “그래서인지 나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해주신 것 같다”고 전했다. 이 학우는 얼마 전 외조부모와 함께 여행에 갔다 오기도 했다. 어린 시절 조부모의 손을 잡고 다니던 이 학우가 어느덧 자라 조부모를 모시고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녀는 “조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들려드릴 수 있도록 그들이 건강히 오래 사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편 숙명인들은 할아버지보다는 할머니와, 그리고 친조부모보다는 외조부모와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친밀한 관계의 조부모는 누구인지(복수응답 가능)’인지 묻자 ‘외할머니’를 택한 학우가 67.79%(301명)로 가장 많았다. ‘친할머니’를 선택한 학우가 42.11%(187명), ‘외할아버지’ ‘친할아버지’를 선택한 학우가 각각 27.48%(122명), 14.64%(65명)로 그 뒤를 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비단 본교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다. 한국노년학회에서 2014년 발표한 「청년기 손자녀-친/외조부모 간 유대와 접촉, 가치 유사성 및 부모-조부모 관계 질과의 관계」에 따르면 친조부모보다 외조부모와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는 모계, 즉 외조부모와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는 사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동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손자녀들은 ‘친할머니보다 외할머니가 더 많은 물리적인 지원 및 정서적 지지를 제공해 준다’고 느낀다는 것이 드러났다.

할아버지·할머니, 사랑의 또 다른 이름
‘조부모와 친밀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주관식)’라는 질문에 응답한 295명 중 43.05%(127명)의 학우가 어린 시절 조부모와 함께 살았던 경험이 있었다. 정현미(법 14) 학우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외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맞벌이로 인해 정 학우를 돌볼 수 없었던 부모를 대신해 외조부모가 정 학우의 양육을 담당한 것이다. 정 학우는 “외조부모님 밑에서 컸던 영향으로 아직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현재는 함께 살고 있지 않지만 가까운 곳에 사시는 외조부모님을 자주 찾아뵙는다”고 말했다.

정 학우는 조부모의 사랑을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어쩔 수 없이 훈육을 담당해야만 하는 부모와는 달리, 조부모는 행위의 잘잘못을 떠나서 언제나 조건 없는 지지와 애정을 주기 때문이다.
정 학우는 “할아버지에게 나의 어린 시절의 얘기를 많이 듣는다”며 정 학우가 아기 때 분유를 먹다 급작스럽게 쓰러졌던 일화를 말했다. 정 학우의 할아버지는 쓰러진 정 학우를 안고 헐레벌떡 병원으로 달려갔다. 정 학우의 외할아버지 유종구(82·남) 씨는 그때를 떠올리며 “너무 놀라 맨발로 뛰쳐나갔다”며 “다행히 현미가 금방 건강을 회복했지만 당시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말하며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2015년 겨울, 정 학우는 외조부모와 함께 베트남 여행을 했다. 부모 없이 조부모와 손녀만 떠난 여행이었다. 유 씨는 “현미 덕분에 생각도 않던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났다”며 “지금도 기억나는 즐거운 여행이었다”고 흐뭇해했다. 정 학우는 언젠가 조부모와 동유럽으로 여행을 가고자 한다. 조부모의 건강을 염려해 여행이 미뤄지고 있지만 조부모를 배려해 여행 계획을 세우면 가능하지도 않을까 희망을 품는다.

유 씨는 “자식 사랑이랑 손녀 사랑은 다른 것 같다”며 “자식보다 손녀가 더 예쁘다”고 말하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어 “가장 바라는 건 현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거다”고 정 학우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다.

이처럼 외조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정 학우이지만, 그녀도 외조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정 학우는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보낼 시간이 부족하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정 학우는 조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함께하는 시간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 학우뿐 아니라 설문에 응답한 560명의 학우 중 ‘조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복수응답 가능)’라는 질문에 68.75%(385명)의 학우가 ‘함께하는 시간 마련’을 꼽았다. 그 외에 39.28%(22명)의 학우는 ‘공감대 형성’을, 14.11%(79명)의 학우는 ‘경제적인 여유’라고 답했다. 조부모에게 친구 같은 손녀가 되고 싶다는 신아름누리(사회심리 17) 학우는 “조부모님과 나는 세대 차이로 인해 공유하지 못하는 관점이나 상황이 많다”며 “세대 차이를 극복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친조부모와 함께 살았던 이희주(문헌정보 16) 학우는 친조부모와 자신의 친밀한 관계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맞벌이하는 부모에 의해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친조부모에게 맡겨졌기 때문이다. 이 학우는 “긴 시간 동안 나를 돌봐주시고, 키워주셨기 때문에 부모님보다 더 애틋하고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잦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학우의 조부모는 오늘의 그녀를 만들어준 사람이다. 이 학우는 “예의범절을 중요시하는 모습, 타인을 먼저 배려하려는 마음가짐, 분명한 의사전달, 그리고 환경을 소중히 하는 태도까지 나를 구성하는 상당 부분은 모두 조부모님으로부터 형성된 것 같다”며 자신에게 조부모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맞벌이 부부가 보편화되면서 조부모가 손주의 양육을 담당하는 가정이 증가했다. 2015년 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맞벌이 부부의 비율은 47.5%로 나타났다. 이에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를 일컫는 ‘시니어 맘(Senior-mom)’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 현상은 1세대와 3세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숙명인에게도 한때 조부모는 제2의 부모인 시니어 맘이었을지도 모른다. 숙명인들은 부모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조부모에게 부모 못지않은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현재는 조부모와 서먹한 사이라고 할지라도 숙명인은 분명 조부모에게 부족함 없이 예쁜 손녀다. 이번 어버이날에는 조부모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잡아 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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