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칼럼]

관태기라는 신조어가 있다. 관계를 맺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지금의 나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22살, 3학년.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시작했고, 적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겼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겼다니. 주변인들이 자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과거의 필자가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소스라치게 놀랄 법도 하다.

고등학교라는 비교적 좁은 사회에서 반복된 생활을 영위하던 때, 친구는 모든 것이었다. 그 작은 사회에서 혼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곧 비주류를 의미했고,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좋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필자는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무리에 속하기 위해 꽤나 노력했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하고, 10여년을 함께하던 가족과도 떨어진 뒤, 20살의 필자는 꽤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필자를 무시하던 사람, 존중해주던 사람, 배려하던 사람, 이용하던 사람. 어린 마음에 모든 사람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생각보다 어려웠고, 모두를 포용하려던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상처를 받고, 동시에 깨달음도 얻었다.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 점점 사람들과의 관계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인생의 진리와도 같은 무엇을 깨달은 뒤부터였다. 언젠가부터 위태위태한 인간관계를 회복하고자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다행히 점차 혼자가 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세상에는 나와 같은 부류들이 많았는지, 사회는 점차 혼밥, 혼술이 익숙한 분위기가 되었고, 점차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현대인들은 바쁘고 반복적인 삶을 살며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고, 인간관계에 상처받고, 점차 혼자 지내고자 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고. 이들의 말에 따르면, 많은 현대인들은 지금 ‘관태기’ 중이다. 너무 가까이도, 멀리 가서도 안 되는 인간관계라는 난로 속에, 작은 불씨 하나 없는 그런 ‘관태기’.

오늘도 필자는 혼자를 추구하지만, 많은 이들의 관태기를 바라보며 모순적이게도 혼자가 아님에 위안을 얻는다.

윤영진(역사문화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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