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윤나영 기자>

국내 최초의 여성 지휘자이자 한국 바로 본교 김경희 관현악과 교수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지니고 재능을 펼쳤던 그녀. 지휘자가 되기 위해, 또 지휘자로서 성장하기 위해 어려운 일도, 고생했던 경험도 많았지만 단 한순간도 희망은 잃지 않았다.

지난 23일(수), 본지는 음악대학 학장실로 그녀를 찾아갔다. 단 하나의 꿈을 향해 평생을 달려온 그녀의 당찬 이야기를 들어봤다.

꿈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다
처음 지휘자의 꿈을 가지게 된 계기로 김 교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운동장에서 애국가를 지휘한 경험을 떠올렸다. 전교생이 모이는 운동장 전체조례에서 애국가 지휘를 맡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때부터 어렴풋 지휘자가 되는 꿈을 생각할 수 있었죠”라고 말했다.

지휘자가 되고자 결심이 선 것은 15살 때였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의 풍부한 연주와 아름다운 지휘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던 어린 소녀를 매료시키기 충분했다. 베를린 교향악단에 흠뻑 빠진 그녀는 꼭 독일로 가 지휘를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멋진 선율을 들으면서 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이에 그녀는 언제나 독일로 유학을 가려는 열정을 인지 않은 채 음악 공부에 매진했다.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선택했고 본격적으로 작곡 공부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지휘를 배우기 힘들었던 시절이라 작곡을 배우는 것으로 유학을 준비했죠”

한편 그녀가 꿈을 키워나간 과정은 사실 평탄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다양한 악기를 배워왔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음악을 공부하기에 경제적 여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한 달간 수강한 작곡 수업에서 수강료를 내지 못해 수업을 듣는 대신 아르바이트로 돈을 마련했던 때도 있었다.

대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창 대학 생활을 즐겨야 할 새내기였지만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지인의 아파트에서 지인의 자녀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일을 했다. “11시에 일하는 집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야 학교 공부를 할 짬을 낼 수 있었어요” 하지만 대학생이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지자 동네 아파트 단지에서 그녀가 음악 과외를 도맡기도 했다. 그녀는 당시를 떠올리며 “몸은 힘들었지만 항상 꿈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죠”라고 말했다.

졸업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유학을 가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공을 살려 2년 동안 어린이 합창단 등 음악 프로그램을 맡아 일하며 경험도 쌓았다.

졸업한 지 2년 만인 1982년, 드디어 그녀는 꿈에 그리던 베를린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머나먼 타지, 꿈을 향해 전진하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독일로 유학을 떠나는 데 적잖은 걱정을 내비쳤다. 당시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독일에 머물며 공부하려는 그녀의 의지는 확고했다. 김 교수는 “독일은 우리나라보다 오케스트라도 발달해 있었고 유명한 음악가들을 많이 배출한 역사가 돋보였어요”라며 “독일에서 유학하겠다는 결심을 굽힐 순 없었죠”라고 말했다.

작곡과에서 배웠던 내용들을 기초로 하는 과목들이 많아 수월한 부분도 있었지만 지휘과에선 실기, *화성학, *대위법, *시창 *청음, 오페라 코치, 지휘 실기 등을 한 번에 공부해야 돼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한국과 다른 독일의 화성학 기법이었다. 한국은 미국식 화성학 기법을 사용하지만, 독일은 독일식 화성학 기법이 따로 사용되기에 처음부터 익히는 시간이 필요했다. 화음을 강조하는 청음도 힘든 점 중 하나였다. 그녀는 “독일 학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화음 교육을 많이 받아 익숙해 했지만, 저에겐 낯설었죠”라고 말했다.

2년 동안 모은 유학 자금이었지만 독일에서 생활한 지 6개월 만에 김 교수에게는 생활비조차 남지 않게 됐다. 그녀는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방학 기간에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함께 공부하던 독일 친구들은 그녀가 공장일을 한다는 말에 모두 놀라곤 했지만, 그녀는 험한 일을 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용품을 만드는 공장, 보청기 공장 등 안 해본 일이 없어요”라는 그녀는 “뜨거운 재료를 만지다 손을 다치는 일도 있었죠”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공장이 주로 도시 외곽에 있었던 탓에 항상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고, 버스와 지하철을 4번씩 갈아타서야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공장에 도착하면 쉴 틈도 없이 온종일 일했다.

방학 중에는 일을 해야 했기에 악기를 연주할 시간도, 체력도 남아나지 않았다. 개강 후 학업으로 돌아오는 데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김 교수는 “학교에 돌아와 교수님께 혼이 나기도 했어요”라며 “방학 내내 일을 하는 바람에 손이 굳어 제대로 악기를 연주할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다시 실력을 회복하기 위해선 하루에 9시간 이상 연습을 거듭해야 했다. 그녀는 당시 공장 일을 했던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다양한 경험이 지휘 공부와 음악 세계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음악계를 비추는 등불이 되다
베를린 국립음악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귀국해 지휘자로서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맡은 악단은 대전시립교향악단이었다. 이외에도 신인 여성 지휘자로서 주목받으며 KBS 교향악단과 서울시교향악단에서도 초청을 받는 등 지휘자로 활발히 활동을 시작했다.

“지휘자는 ‘도마 위의 생선’과 다름없는 직업이죠. 항상 무대에 설 때마다 극도의 긴장감을 가져야 하는 일이에요” 지휘자의 아주 작은 손짓에도 아예 다른 음악소리가 나오게 되는 오케스트라. 그녀는 항상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마음’으로 지휘에 임하곤 했다.

하지만 정작 김 교수를 괴롭혔던 것은 지휘자가 남성 고유의 영역이라는 사회적 편견이었다. 여러 악단에서 지휘를 맡았던 김 교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휘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을 자주 겪었다. “어떻게 여자한테 지휘를 다 받아보냐”는 비아냥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이성적으로 대응하려고 노력했다. “제가 화를 내거나 좌절했다면 지휘자로서의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을 거예요” 그녀는 편견과 마주칠 때마다 모두를 자신의 편으로 포용하려 노력했다. 김 교수는 “무대에 오르기 전, 여성이라는 이유로 절 모욕을 했던 분며 찾아와 사과했던 적이 있어요”라며 “당시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고 서로 마주보며 울었던 기억이 나요”라고 말했다.

항상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많은 단원들이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김 교수를 인정하지 않던 단원들도 점점 그녀를 ‘지휘자’로 인정하게 됐다. 김 교수는 “저는 여성이라는 조건이 한계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라며 “제가 여성이 지휘자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 같아 뿌듯해요”라고 말했다.

과천시립아카데미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한 그녀는 국내 최초 여성 상임지휘자로 임명돼 모두를 놀라게 했다. 김 교수는 과천시립청소년교향악단을 과천시립아카데미오케스트라로, 다시 과천시립교향악단으로 승격시키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시립교향악단은 시의 문화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에 그녀의 노력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힘을 보탰다. 그녀의 노력이 인정받아 2012년에는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다. 과천시립청소년교향악단이 과천시립교향악단으로 승격한 일은 관현악을 전공한 많은 연주자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여러 악단을 지휘한 뒤 그녀는 모교로 돌아왔다. 현재 본교 관현악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학우들과 함께 연주를 거듭하고 있는 그녀. 수업을 하며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철칙인데도 학우들에게는 ‘누구보다 무서운’ 교수님으로 통한다고 한다. 많은 악기의 소리가 어우러지는 오케스트라 연주 속에서 자그마한 실수마저 날카롭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학생들도 자신이 전문가라는 마음가짐으로 연주에 임해야죠”라며 “학생들이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학우들에 대한 애정을 내비쳤다. 김 교수는 “음악에 대한 깊이 있는 수업을 하는 것은 음표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요”라며 “수업에서는 엄격하지만, 학생들이 오케스트라 연주를 즐거워하길 바라죠”라고도 덧붙였다.

한편 교육자의 입장에 서게 되니 한국의 지휘 교육이 열악하다는 점이 눈에 밟혔다. 현재 한국의 지휘 실습은 주로 지휘 전공생들이 관현악과 학생들의 수업에 참관해 몇 명이 직접 지휘를 해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전부다. 김 교수는 “독일에서는 대학이 오케스트라를 불러 지휘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실습할 수 있게 해요”라며 한국 학생들이 지휘를 충분히 경험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이에 그녀는 지휘자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김 교수는 “한국에서 뛰어난 지휘자를 발굴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며 포부를 내비쳤다.

 

아름다운 소리를 좇아 유학길에 오른 당찬 소녀는 이제 엄격하면서도 유쾌한 지휘자로 성장했다. 후학을 길러 음악계를 풍성하게 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는 김 교수. 여성을 지휘자로서는 선발하지 않았던 시절에 시작한 그녀의 여정은 꿈을 좇는 누군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김 교수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타지에 놓인 외로움 속에서도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어려움조차 포용하고 음악을 이끌어내는 것이 진정한 지휘자라 말한다. 김 교수에게 음악이란 언제든지 삶을 기쁘게 느낄 수 있도록, 삶에서 호흡하게 하는 신선한 산소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꿈을 위해 달려 온 그녀는 꿈에 부푼 많은 음악인을 위해 지휘자로서 손을 뻗었다. 오늘도 김 교수는 학우들의 열정 어린 연주를 지휘하며 모두의 꿈을 다정히 안아주고 있다.

▲ <사진=고지현, 하재림 기자> 김경희 교수. 국내 최초 여성 지휘자이자 국내 최초 여성 상임지휘자이기도 하다. 현재는 본교의 관현악과 교수로서 음악대학장을 맡고 있다.

*화성학 : 음악에서 화음의 성질을 밝히고 음을 서로 연결하는 방법
*대위법 : 작곡기법 중 독립성이 강한 두 개 이상의 멜로디를 결합하는 것
*시창 : 리듬감이나 음에 대한 감각을 기르기 위해 악기 등의 도움 없이 악보를 처음 보고 노래하는 것.
*청음 : 박자와 선율, 화음 등을 듣고 그 음들을 알아채 악보에 받아 적는 활동

저작권자 © 숙대신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