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감사의 달 5월이다. 긴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평소에 표현하지 못하던 마음을 화사하고 아름다운 꽃들과 달콤하고 부드러운 케이크를 통해 주고받고 있다. 이제 장황하지만 자신의 육성 그대로인 편지를 통해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깊은 곳엔 ‘말’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말 한 마디가 씻을 수 없는 오해와 상처를 낳기도 한다. 소음공해에 시달릴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엔 말들이 난무하지만, 정작 마음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렇게 빛을 보지 못한 말들은 피부에서 뼈 속까지 구석구석 박혀, 크고 작은 상처를 내기도 하고, 수많은 오해와 왜곡을 낳기도 한다.


사람과 관련된 일이 모두 그러하듯 말도 심리와 복잡하게 연결돼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느 자리, 어떤 상대인지에 따라 말이 술술 풀려 끝없이 나오기도 하고, 꽉 막혀 반벙어리처럼 자신도 알 수 없는 ‘아부부부’만 되뇌기도 한다. 말도 손뼉처럼 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것으로, ‘막는 말’과 부딪치면 소리는 억압되고, ‘푸는 말’과 만나면 ‘챙’ 하고 시원스레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주도적인 말 문화는 ‘푸는 말’보다 ‘막는 말’ 쪽에 치우쳐 있는 듯하다. 거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우와 이유들이 있겠지만, 크게 느껴지는 것 중의 하나가 ‘평가하는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모든 것을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고, 잘하고 못하고, 나눠 생각하는 경향이 뿌리 깊이 박혀있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듣는 최고의 칭찬은 “잘했다”이고 뒤이어 “다음엔 꼭 일등을 해라, 네가 제일 잘나야 한다.”와 같은 격려의 말을 듣는다.

 
모든 것을 서열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이 보편적 가치관으로 자리한 우리 사회에서 가치관 자체를 문제 삼기란 쉽지 않다. 일등을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한탄과 일등을 차지한 사람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의 복잡한 시선만이 자리할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 속에 수많은 평가의 말을 담아두고 자신의 말을 검열하기 시작한다. 파열돼 세상에 울리고자 하는 수많은 말들이 검열에 걸려 꾸역꾸역 다시 안으로 밀려들어 간다. 그 대신 평가의 덫에 걸리지 않을 안전한 말들만 선택적으로 끌어 올려지고 따라서 나와 절실한 관계가 없는 연예인을 비롯한 제3자에 대한 이야기들이 난무한다. 가끔 깊이 처박아놨던 부끄럽지만 진실한 이야기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쳐들고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 때 앞에 자리한 이는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이거나 적어도 나를 평가적 시선으로 보지 않는 이다.

 
학벌을 비롯한 서열 중심의 사회에서, 더군다나 대부분의 부모가 자식들이 삼류적 삶을 살까봐 노심초사하며 강박적 징후를 보이는 사회에서 모든 것을 평가적 시선으로만 보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꿔 말해 보겠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등 나와의 긴밀한 대화를 나눠보자. 나에 대해 섣부르게 점수매기기 전에 먼저 잘 알아보자. 그리고 그러한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자. 그렇게 나와 타인을 결정된 존재로 재단하기보다 연구 대상으로 바라볼 때 깊숙이 묻혀 있었던 수많은 말들이 터져 나와 말과 관계의 혁명을 이뤄 낼 것이다.

 

국문학과 박사4학기 최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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