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칼럼]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국어사전에 실린 ‘어른’의 정의다. 완전한 사회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누군가의 보호를 받기만 하는 처지도 아닌 그 어딘가의 경계에 놓인. 필자는 요즘 이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큰 고민을 안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필자가 되려고 하는 ‘어른’과 사회에서 말하는 ‘어른’의 의미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으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다.

“넌 아직 사회생활을 덜 해봐서 이해하지 못해” ‘어른들’에게 최근에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불합리한 줄 알지만 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에 따르면서, 현실적이고 융통성 있는 방법보다 서류상의 절차가 순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따르면서, 사람보다는 돈과 성과를 중요시하는 쪽을 택하면서 ‘어른이 되면’ 이 모든 일들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말로 필자를 비롯해 불합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계인들을 설득하려고 했고, 그것은 강요처럼 다가왔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상황의 불합리성을 알면서도 누군가가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일은 꺼리겠다는 것. 좀 더 현실적인 방법일지라도 서류상의 절차로 환원되기 어려운 일은 시도하지 않겠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었다. 그렇게 곳곳에서 발생하는 잡음을 피할 수 있을 만큼 피하며 조용히 원래 놓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어른들이 말하는 ‘사회생활을 하며 어른이 되는 것’으로 느껴졌다.

지금껏 어른이 되는 것은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통찰력이 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사회 속에서 어른이 돼가는 것은 옳고 그름을 구분하려는 의지가 없어지는 것에 더 가깝다. 이렇게 ‘어른’이 된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이 모든 과정을 설명한다.

강단에 선 명사들과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비치된 온갖 자기계발서들은 도전, 신념, 정의, 희망 등을 얘기한다. 하지만 필자가 경험한 어른들 중 열에 아홉은 필자에게 정의나 신념이 아닌 사회 내에서의 순응, 그리고 불합리에 대한 적당한 합의를 권했다. 사회의 문턱에 선 경계인은 과연 무엇에 따라 어른이 돼야 하는 것이며, ‘사회생활’을 통해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김은희(한국어문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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