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요즘 AI가 화제다. 인류 최강의 바둑 명인이 구글 집 마인드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을 상대로 인간의 명예를 걸고 목하 일전을 벌이고 있다. 예상은 엇갈린다. AI의 학습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아직은 시기 상조라는 입장과 바로 이 순간에도 AI는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고 있기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주장이 교차한다. 일찌감치 20년 전 컴퓨터에 무릎 꿇은 체스와는 달리 바둑은 훨씬 많은 경우의 수를 가진 복잡성으로 인해 이제까지 인공지능의 도전 과제가 되어 왔다. 기계가 인간을 뛰어넘느냐, 아니면 그 시점이 미래로 유보되느냐? 바둑 게임의 차원을 넘어 미래사회의 지형도와 인간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상징적 승부이기에 전 세계의 관심이 이 대결에 쏠린다.

승부 결과야 어찌 되든 인공지능이 이제 다분야에서 인간을 대체하는 대세는 피할 수 없어 보인다. AI가 미래의 핵심 산업으로 각광받는 이유다. 향상된 문제해결능력으로 스마트 공장, 의료 서비스 등을 포함해 공공서비스, 온라인 유통, 교육, 교통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AI는 도입되고 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인간 삶의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AI가 인간 삶의 근간을 흔들기도 한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100% 신뢰도와 안전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당분간 AI는 인간의 인지능력과 공존하는 형태로 발전할 것”이라 전망하지만, 인간이 일자리를 AI에게 빼앗기는 날도 멀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과연 인간은 기계와의 차별성을 무엇으로 주장할 수 있을까?

감성과 그것에 기초한 정서적 공감이야말로 기계가 범접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를 충족시켜야 한다. 기계는 정서적 공감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인간의 정서적 공감이 사회적 순기능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목도한다. 인간이 ‘사랑’의 이름으로 얼마나 때론 추악하며 폭력적인지를,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지를. 여기서 리들리 스콧의 저주받은 걸작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1982)를 떠올린다. 인간과 복제인간의 구별이 모호해진 미래 사회에서 복제인간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경찰인 주인공. 그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복제인간의 죽음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과연 나는 내가 인간임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이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AI. 인간보다 더 인간을 ‘사랑’하는 복제인간. 어쩌면 인간이 창조한 인공지능 AI가 넘보는 것은 인간의 역할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존재 이유’를 증명할 수 있는 이는 인간 자신 외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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