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송창애 작가>

하얀 종이와 검은 먹으로 선과 여백의 조화를 그려내는 동양화. 음양을 중시하는 동양화는 때때로 현상계 너머의 깊은 내면까지 투영해 보이기도 한다. 여기 동양화처럼 깊은 내면을 가진 작가가 있다. 바로 송창애(회화 95졸, 이하 송 동문) 동문이다.

미술과의 운명적인 만남부터 절필의 과정을 겪고 극복하기까지, 송 동문에게 그림이란 자아를 흔든 시련인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물(水)로 그린 물(物)그림’을 보여주는 그녀는 캔버스에 흑연을 도포시키고 그 위로 공기압축기를 이용해 물을 분사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녀는 물을 통해 생명의 본질에 대한 고찰을 제시하고 싶다. 20여 년을 동양화와 함께한 송 동문의 미술 인생 이야기, 지금부터 들어보자.

◆ 共倒同亡‘공도동망’, 그녀와 동양화의 운명
고교 시절, 송 동문의 장래희망란에는 ‘화가’가 아닌 ‘교사’가 적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지만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은 탓에 그녀는 교육대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은 결국 그림이었다. “그림이 좋았고, 제가 평생 그림을 그려야만 행복할 것 같았어요”

미술 선생님이 내주신 수묵화 과제를 통해 송 동문은 그림이 그녀의 운명임을 깨달았다. 부채에 수묵화를 그려오라는 과제를 받고 그녀는 밤새 신윤복의 ‘쌍무도’를 부채 위에 그려갔다. 그날 송 동문은 과제에 몰입하다 못해 시간이 길게 늘어난 듯한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 과제를 마치고 창밖을 보니 어느새 새벽 동이 트고 있었다. “아직도 그 때가 생생하게 기억나요. 저는 그때 ‘카이로스의 시간*’을 겪었다고 생각해요. 시간의 흐름도 잊을 정도로 그림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미술 대학으로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혔죠”

1998년, 송 동문이 대한민국 미술대전 동양화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은 것은 또 다른 운명적인 사건 중 하나다. 접수 마감 전날, 하루 만에 완성한 그림은 어린 나이의 송 동문에게 우수상이라는 큰 영예를 안겨줬다. 그날 무의식중에 작품의 형상을 떠올렸고, 곧바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게 집중했다. “그림을 완성하곤 진이 빠져 바로 잠들었어요. 다음날 그림을 보곤 ‘이걸 내가 그렸다고?’라고 생각할 정도로 놀랐어요” 하지만 접수 마감 당일이었기에 그녀는 제한시간 안에 작품을 제출하지 못 할까봐 걱정했다. 전날 비가 많이 와 종이가 마르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려와 달리 종이는 모두 말라 있었고 그녀가 작품을 제출하고 나니 맑은 하늘에선 거짓말처럼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모든 게 순조로웠던 경험이었죠. 또 하루 만에 그린 그림으로 수상하면서 제가 즉흥성과 직관성의 성향을 가진 작가임을 깨달았어요”

◆ 절필에서부터 극복까지
대한민국 미술대전의 우수상은 송 동문이 그림에 큰 자부심을 갖게 했다. 그러나 이듬해, 송 동문은 남편을 따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의 10년은 그녀에게 고뇌의 시간이자 그녀의 예술관을 뒤흔든 시간이었다.

그녀가 마주한 미국에서의 생활은 고독했다. 한국에서는 큰 상을 받으며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미국에 오니 한순간에 가정주부가 된 느낌이었다. 평범해진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범한 삶에 행복을 느끼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적도 있어요. 그럴수록 제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죠”

그러던 중,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 두 사건은 송 동문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 줬다. “어느 날 뉴스를 봤는데 벌거벗은 이라크 포로들이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고 옆에서 미군이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고 있는 사진을 봤어요. 거짓말 같은 상황이 현실에 일어나고 있었던 거죠” 적나라한 이미지에 송 동문은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고 장식적인 그림을 그리고 파는 자신에게도 회의감을 느꼈다. 이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뇌리에 남아 잊히지 않는 인간 피라미드의 형상을 계속해서 스케치했다. “회의감이 찾아오면서 예술가의 사회적 소명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어요” 결국 송 동문은 그림 그리기를 망설이다가 몇 년간 붓을 놓았다.

 ▲2010년 송 작가의 ‘MaeSS Land’ 中 ‘Mass-clod’

그녀가 그림으로부터 도망친 지 2년, 붓을 잡지 않으니 몸과 함께 마음도 지쳐갔다. “정신적으로 힘든 것을 스스로 고통받지 말고 그림으로 풀어보자고 생각해서 다시 캔버스로 돌아왔죠” 작업 방법을 고민하던 중, 그녀는 2년 전 스케치한 인간 피라미드 형상을 복사기에 넣고 즉흥적으로 복제하기 시작했다. “계속 복제하니 스케치의 선이 겹치면서 사람의 형상이 구름이나 돌, 실타래처럼 변하더라고요” 송 동문은 이 작업 방법을 이용해 인간으로 만든 풍경화 ‘MaeSS Land’ 시리즈를 완성했다. “이 시리즈의 그림은 멀리서 보면 풍경화지만 가까이서 보면 인간의 형상으로 보이죠.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동양 사상과 복잡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 역발상을 통한 비움의 미학
“미국에서 ‘MaeSS Land’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과거에 사용했던 붓들을 모두 꺾어 버렸어요. 새로운 것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것들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죠” 송 동문은 새로움을 위해 연필 한 자루를 들고 처음부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하늘 위의 구름을 보다가 새로운 작업 방법을 떠올렸다. 텅 빈 하늘에 구름이 떠 있다는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꽉 찬 하늘에 구름이 비어있다고 느낀 것이다. 송 동문은 비움으로써 대상을 표현할 수 있다는 역발상을 발견했다. “지우개로 물감을 지우면서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역설의 미학이죠. 제가 지우개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에요”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지우개로 지우면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계속됐다. 그러나 그녀에게 고비가 찾아왔다. “큰 캔버스에 지우개로 지워가며 작업하기에는 노동력의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리는 즐거움을 잊어버린 기분이었어요” 그러던 중 동료 작가가 낙엽을 손쉽게 쓸기 위해 추천해준 공기압축기가 눈에 들어왔다. “흑연으로 감싼 캔버스에 공기압을 쏘면 바람으로 인해 흑연이 날아가면서 지워지더라고요” 그녀는 지우개와 바람을 거쳐 마침내 물과 공기압축기를 연결시켰다. “수많은 시도를 통해 물을 이용한 저만의 작업 방식을 터득한 거죠”

송 동문은 지우개와 바람, 물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지운다’는 속성이 동양사상과 상응한다고 말한다. 동양화가들이 선과 여백의 조화를 화폭에 담는 것처럼 비우는 것 또한 중시하기 때문이다. “허와 실의 조화를 중시하는 동양사상을 현대적으로 어떻게 표현해낼지에 대한 해답은 그림을 ‘지운다’는 역발상이었어요” 비움으로써 그림을 그린다는 역발상과 물이라는 매개체가 만나 그녀는 지금 ‘워터풀 展’의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 그녀의 미술을 말하다

 ▲ 2014 ‘워터스케이프(waterscape)’ 展
전시 작품 앞에서 송창애(회화 95졸) 동문

“대학생 때는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해요” 송 동문은 넉넉하지 못한 형편 탓에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미술 입시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남들보다 사회에 일찍 발을 디딜 수 있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대학 시절에 모범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후회돼요” 송 동문은 현재 후회되는 것들을 후배들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후배들이 여행을 통해 식견을 넓히고 사랑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보길 바라요. 그런 것들이 자양분이 돼 여러분을 튼튼하게 해줄거에요”

누구보다 그림을 사랑하는 그녀는 후배들에게 또 한가지 당부한다. “그림 자체가 하나의 도구가 되지 않았으면 해요” 그림을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굉장히 고독하고 힘들어요. 그림을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미술에 대한 순수한 가치관과 확신이 부족해 고난의 시기가 왔을 때 극복하기 힘들죠”

송 동문은 그림을 그릴 때 작업실이 자기만의 세상으로 다가오고, 그림을 통해 행복감과 자유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물 작업을 하다 보면 어릴 때 하던 물총 놀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온몸에 물이 튀기고 땀으로 젖는 과정에서 어린 아이로 돌아간 듯한 자유를 느끼게 되죠” 또 그녀는 그림을 통해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싶다고 한다. “내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사회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소통의 장을 만들고 싶어요”

*카이로스의 시간 : 일상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벗어나 시간이 길거나 짧다고 느껴지며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순간. 개인이 마음먹기에 따라 카이로스의 시간 길이는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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