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임지민 기자>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역사를 잊은 국가에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자 미래를 위한 초석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교훈을 얻는 게 중요하다. 여기 78년의 세월 동안 역사적 교훈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전 국사편찬위원장(이하 국편위원장)이자 본교 명예교수인 이만열 교수다.

처음 이 교수를 만났을 때 눈빛에서는 꼿꼿한 선비정신이 느껴졌다. 78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힘이 넘쳤다.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말하는 이 교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 지금이라도 국정화를 중단해야한다
이 교수는 최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러 신문사와 인터뷰를 했고, 칼럼도 투고하고 있다. 현 정부는 검인정제로 운영되는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적이라며 지난달 12일(월)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교수는 “지금이라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중단하라”며 안타까워했다.

“독재세력, 부패세력의 상징이 누구겠어.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야. 국정화 교과서는 독재 부패세력에 대한 비판을 완화시키고 역사적으로 포장하겠지” 이 교수는 한국사 교과서가 국정으로 바뀌면 ‘독립운동의 정신 위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이 부정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현 검인정제는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 근현대사를 서술하고 있다. 3·1운동, 4·19혁명의 정신 아래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한다는 헌법에 따른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 속에서 대한민국은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을 통해 건국된 나라다. 이 교수는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 8월 15일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 바로 그 증거야. 대한민국 ‘건국’ 축하식이라고 하지 않잖아”라며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된 나라라고 말했다. 증거는 이뿐만이 아니다. 1948년 9월 1일, 이승만 정부가 처음으로 발행한 관보의 발행 일자는 민국 30년 9월 1일이었다. 건국한 지 30년이 되었다는 의미다. 이 교수는 “당시 사람들 모두 우리는 독립운동의 전통 위에 일제의 강포한 세력과 싸워 대한민국을 세웠다고 인식했지”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검인정교과서가 김일성과 주체사상을 가르친다’며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헌법에는 3.1운동, 4.19혁명의 정신과 함께 조국의 평화통일에 대한 언급이 있어. 자연히 북한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겠어?”라며 한국사 교과서에서 김일성이 어떤 존재인지, 주체사상이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지 알고, 그것의 폐해를 아는 것은 헌법 정신에 입각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국정화 교과서를 막기 위해선 젊은이들, 특히 20대의 목소리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4.19혁명 이래로 우리 역사상 기득권을 변화시켰던 건 젊은이들 밖에 없어. 심정으로 반대하면 무엇 하나. 행동으로 나서야지. 학생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변하는 게 없어”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무한 경쟁이 20대 젊은이들을 취업 걱정, 스펙 걱정에 매몰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더 많은 사람이 한국사에 관심을 가지길 바란다
이 교수는 역사를 공부할 때 단순히 사실을 암기하기보다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본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때도 학생들이 그 의미를 알아가길 원했다고 한다. 만약 학생들이 동학 운동을 배운다면, 사건이 일어난 연도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요구했던 신분제 철폐, 청상과부의 재혼이 민족사적 관점에서 얼마나 진보적인 요구였는지 생각하기를 바랐다.

더불어 많은 국민이 한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길 원했다. 2003년 6월, 국편위원장에 임명된 후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을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위) 사이트(http://www.history.go.kr)에서 무료로 열람할 수 있게 하고,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제도를 만들었다. “한국사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큰 문제였지. 지금처럼 교과서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 교육 자체의 소홀함이 컸거든” 당시 아베의 교과서 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 때문에 사회적으로 한국사 교육의 중요성이 커졌던 만큼 이 교수는 어떻게 하면 한국사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단순히 한국사 교육시간을 늘리긴 어려웠어. 교육 과정상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이 교수는 이전까지 500만 원 상당의 자료 CD로만 볼 수 있었던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을 국편위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무료로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반응은 대단했다. 하루 2,500명의 사람이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을 찾았다. 국민이 자발적으로 역사 학습을 할 수 있도록 만든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내년 초 30회를 맞는다. 이 교수는 “요새 공무원 시험이나 기업 채용에서도 반영하고 있으니 한국사 교육에 도움이 되고 있어”며 뿌듯해했다.

◆ 역사를 통해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교수는 역사의 의미를 찾을 뿐만 아니라 그 교훈을 계속해서 실천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악순환을 끊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이 일본 민족에게 인권을 유린당한 걸 생각해봐. 그들이 한 행동을 우리가 반복해서는 안 되지. 불법체류자, 외국인 노동자에게 우리는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야 해” 23년 동안 이 교수는 NGO 단체, 희년 의료회(국제 민간 교류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해당 단체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회원비를 받고 일주일에 한 번씩 무료로 진료와 약을 제공한다. 제휴 병원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혜택도 받을 수 있다.

격동하는 근·현대사를 직접 경험했기에 이 교수는 전쟁과 독재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다시는 이런 민족적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돼”라고 역설했다. 8세에 광복을 맞은 지 얼마되지 않아 시작된 이념 대립은 이 교수에게 가족을 잃는 비극을 가져왔다. “마을에선 어느 동네 구장이 밤사이 죽창에 찔려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지.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터졌어” 진주와 마산 사이, 전선이 형성돼 있었던 이 교수의 고향은 북한군이 한 달 이상 점령해있었다. 동네에서 살 수가 없었다. 3, 40리 떨어진 피란처와 고향을 오가는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그때 서울에서 공부하던 자형*이 납치됐어. 아버지는 약을 못 써서 돌아가시고, 전장에 나간 사촌 형 둘은 돌아오지 못했지. 그땐 다들 그랬어”

1980년에는 독재와 군사정권을 비판하다가 4년간 본교를 떠나야 했다. “라디오나 칼럼으로 군사정권을 비판하고 교수 협의회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줬던 것이 문제가 됐던 모양이야. 어머니께서 걱정하실까 봐 아침마다 가방 들고 출근하는 척 나가서 공원에 있기도 했지. 전화를 도청한다는 소문도 있었고 친구 회사에 피해가 갈까 두려워 부탁도 못 했어. 결과적으로는 내 안목을 넓힐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지만 당시엔 정말 힘들었지”

지금도 이 교수는 꾸준히 사회 환원 활동을 하고 있다. 페이스북을 통해 많은 이들과 소통하고 한센병 환자를 돌봤던 산돌 손양원 목사를 기리는 기념사업회, 희년 의료회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 교수는 역사를 바꾸는 건 ‘젊은이들’이라고 말한다. 특히 한국의 역사에서 그래왔다고 강조한다. “4·19혁명, 6월 혁명 때 수많은 사람이 투쟁했기에 지금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거야. 그걸 알아야해. 그땐 무수한 사람이 불이익을 받았지. 숙명여대 선배 중에서도 죽거나 불구가 된 사람이 많아”

인터뷰하는 이만열 교수의 모습<사진=이혜민 기자>

이 교수는 “오늘날 젊은이들은 그들의 희생에 무임승차하고 있어”라고 말한다.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세대가 되기 위해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 시대 사람들이 희생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준 것처럼 이 시대의 젊은이들도 후세에게 일정한 책임을 가져야지”라며 숙명인이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을 당부했다. 역사 연구를 넘어 역사적 교훈을 실천하는 이만열 교수의 모습에서 젊음의 열정이 느껴졌다.

*자형: 손위 누이의 남편을 이르거나 부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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