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09주년을 맞이한 최초의 민족여성사학, 숙명여대. 1906년 창학한 명신여학교에서부터 현재의 숙명여대에 이르기까지 숙명의 인생은 희로애락의 연속이었다. 본지는 109번째 생일을 맞이해, 숙명의 인생그래프를 그려봤다. 다사다난했던 숙명의 인생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된다.

 

◆ 숙명의 역사가 시작되다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조선의 힘으로 만든 여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한 대한제국 황실은 1906년, 명신여학교를 창학했다. 최초의 민족여성사학으로서 숙명의 첫 출발이었다. 교육사상 최초로 한국인인 이정숙이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11세~25세의 양반 여성 5명을 선발해 문을 열었다.

◆ 명신에서 숙명으로
1909년 명신여학교는 숙명여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순헌황귀비가 낳은 영친왕이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그의 당호인 ‘명신재(明新齋)’를 함부로 부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변경된 교명 ‘숙명(淑明)’은 정숙한 덕과 현명한 지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일제에 꺾이지 않은 숙명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억압에서 숙명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본교에서는 강압적인 일본화 교육이 이뤄졌다. 이에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함으로써 일제의 탄압에 저항했다. 바로 숙명 항일 맹휴사건이다. 약 3개월간 계속된 맹휴는 일본인 교무주임의 사퇴와 조선인 여선생들의 복귀로 마무리됐다.

◆ 수준 높은 교육으로의 도약
1946년 대학령 공포로 인해 본교도 대학 승격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22일 숙명여자대학이 탄생했다. 국문과, 영문과, 음악학과, 미술학과로 구성된 문학부와 가사학과, 이학과를 포함한 이학부를 설립했다. 대학으로 승격함으로써 한층 높은 수준의 여성고등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다.

◆ 전란 속 피난길에 오르다
한국전쟁 당시, 정부로부터 피난 지시가 내려오자 본교는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1951년 부산 동대신동에 임시교사를 지었고 1952년 3월에 부산의 한 교회에서 제1회 학사 학위 수여식을 거행했다. 다행히도 휴전협정 이후 서울로 돌아와 청파동 본 교사를 복구하고 9월부터 수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했다.

◆ 숙명, 민주화를 외치다
갖가지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 선거를 실시한 이승만 정권에 대항해 숙명인들은 거리로 나왔다. 민주화를 위한 노력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숙명의 교수들도 함께했다. 1960년 4월 25일 정치외교학과 정요섭, 한용희 교수와 경제학과 이문원, 경영학과 서광순 교수가 시위에 참여했다.

◆ 숙명에서 탄생한 최초의 여성 학군단
2010년 12월 10일, 본교가 국내 최초로 여성 학군단을 창설했다. 첫 모집에서는 전체 60명 모집에 360명이 지원해 6대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당시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으로 인해 일촉즉발의 안보상황에서 본교의 여성 학군단 창설은 큰 의미였다.

◆ 숙명의 캠퍼스를 지켜내다
2014년 10월, 제1캠퍼스 부지 이용권을 놓고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와의 법적 분쟁에서 승소했다. 캠코는 2012년 4월, 본교가 국유지를 무단 점유하고 있다며 변상금 73억여 원을 부과했고, 이에 본교는 변상금 부과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승소 판결은 대한제국 황실이 약속한 역사적 정통성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였다.

◆ 작곡과의 눈물
2014년 9월 1일, 작곡과 학우들이 윤영숙 교수와 홍수연 교수로부터 수업권을 침해당했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며 교수의 퇴진을 요구했다. 지난 12월 13일, 징계위원회를 통해 두 교수는 파면당했다. 현재 윤 교수는 학교 본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3명의 작곡과 학우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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