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졸업생 취업률이 대학의 존폐를 결정할 정도의 중요 지표가 돼 버렸다. 교육부는 졸업생 취업률을 주요 지표로 하는 평가를 통해 대학 구조개혁 프로그램을 추진 중이다. 이 평가 점수가 낮은 대학은 입학정원을 줄이고 점수가 좋은 대학에는 지원금을 준다고 한다. 일부 대학들은 인문계 학과 정원을 줄이거나 폐지하고 이공계를 늘리는 등의 대응을 하고 있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유행이라고 한다. 이것은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뜻으로서 인문계 학생들의 자조적 표현이다. 대학의 목표가 ‘취업’으로 일원화 하는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고등교육법 제28조에 명시하였듯이 대학의 목적은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국가와 인류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심오한 학술이론과 그 응용방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국가와 인류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대학생의 취업이 인문학적 소양보다 우선”이라고 말했다는데 법 정신에 위배되는 사고이다. 법이 정한 목표를 잘 수행하는 좋은 대학에서 공부하면 그만큼 좋은 직장에서 일하게 될 확률이 높다. 좋은 대학은 자연스레 취업률이 높겠지만 취업률이 높다고 해서 좋은 대학인 것은 아니다. 취업률 지표로 대학을 평가하는 방식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한 언론이 분석한 결과, 취업률 높은 대학들의 교육여건이 오히려 낮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취업률 10위내에 드는 어떤 대학은 전임교원 비율, 교육비, 장학금, 도서 구입비 등으로 평가한 교육여건이 100점 만점에 단 4점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반면에 교육여건 상위 10위를 기록한 대학들의 취업률은 전체 대학 평균을 약간 웃도는 수준에 불과했다. 교육여건이 나쁜데도 취업률이 높다는 것은 취업률이 대학의 성과를 평가하는 절대적 지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물론, 대학 교육의 실용성은 더 키워야 한다. 학문이 현실에 대한 압축적 이해를 위한 것이라면 현실 적용력이 떨어지는 것은 그 자체로 자가당착이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면 그 변화를 담아내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소양이 있다면 대학이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기업이 고용을 기피하여 일자리가 급격히 줄고 있는데 그 책임을 대학에 전가하여 큰 소득도 없이 어리석게 경쟁토록 하는 일은 부당하다. 계열별 차이, 직업별 차이, 성별 차이 등을 고려하지 않는 단일 취업률 지표로 일원적으로 대학을 평가하려는 시도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처럼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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