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윤나영 기자 yoonna_10@naver.com>

#‘머리 아침에 감는다vs밤에 감는다’‘점심으로 봉구스 밥버거vs지지고’‘지금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 나간다vs참는다’‘경제학개론 A교수님vsB교수님’ 본교 학우들이 자주 이용하는 익명 커뮤니티 사이트 ‘에브리타임’에 올라오는 글들이다. 점심 메뉴부터 수강할 과목의 담당교수님까지 크고 작은 일들을 결정해 달라는 글들이 빈번하게 올라온다.

◆ 결정하는 게 너무 어려워요
‘결정장애’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느 한 쪽을 고르지 못해 괴로워하는 심리를 뜻하는 신조어로, 요즘 현대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단어다. 어떤 일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마치 셰익스피어 소설의 햄릿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고민하는 모습과 비슷해 햄릿증후군이라고도 한다. 결정장애는 특정한 병이 아니라 심리에 따른 증후군이지만 하루에도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

결정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것부터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다양한 음식점과 메뉴들 사이에서 뭘 먹을지 고르는 데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김나현(미디어 15) 학우는 “식당에 들어가 메뉴판을 보는 순간부터 고민이 시작된다”며 “옆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이런 모습을 보며 짜증을 내기도 하고 직접 메뉴를 정해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 학우는 이러한 상황이 싫어 식당에 들어서기 전 미리 메뉴를 결정해놓기도 했다. “막상 메뉴판을 보니까 마음이 또 흔들리더라고요. ‘다른 것도 좋은데’라는 생각에 다시 고민하게 돼요” 한 가지 메뉴를 고르기가 어려워 여러 가지 메뉴를 모두 주문하는 학우도 있다. 김예린(경영 15) 학우는 “하나를 고르기가 힘들면 여러 가지를 골라요. 당연히 양이 많아 음식도 남기고 돈도 낭비해 매번 후회를 하죠”라고 토로했다.

옷을 고를 때도 이들의 결정장애는 계속된다. 인터넷 쇼핑몰을 애용하는 김나현 학우는 마음에 드는 옷들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어떤 것이 나은지 결정해달라고 부탁한다. 옷이 마음에 들더라도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별로면 다른 옷을 찾아보는 편이다. 이렇다 보니 옷 한 벌 구입하는데 평균적으로 3일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결정이 어려울 땐 아무 옷이나 고르거나 아예 구입하지 않는다. 김예린 학우도 마찬가지다. 옷을 살 땐 여러 사람에게 문자를 보내 의견을 묻는다. 이런 결정장애 때문에 지인에게 ‘하나만 고르면 되는데 그게 뭐가 어렵냐’고 핀잔을 듣기 일쑤다. 매번 자신의 생각보다 남의 말에 따라 옷을 고르다 보니 집에 와서 입어보고는 항상 후회한다.

결정장애를 겪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들 1. 결정장애를 위한 투표 어플인 폴릭 2. 익명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 게재된, 결정을 부탁하는 게시글

◆ 결정을 도와드립니다
학우들은 결정을 내리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한국드라마심리상담협회 최대헌 대표는 “무엇보다 사회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이라며 “선택지도 많고, 정보도 많기 때문에 결정이 어려워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도 또 다른 이유다. 우리 사회는 개인이 선택을 잘못했을 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수용적인 사회가 아니다. 이 때문에 선택에 대한 부담감은 늘어나고, 일상생활에서 선택을 회피하게 된다. 최 대표는 “우리나라의 ‘매뉴얼화’된 사회구조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는 모든 일들이 매뉴얼처럼 정해져 있는 사회로, 고등학교 졸업 후엔 대학을 가고, 대학을 졸업한 후엔 취업을 하는 게 그 예다. 이러한 고착화된 매뉴얼 때문에 사람들은 매뉴얼에서 벗어난 선택을 불안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택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이들의 결정을 도와주는 서비스들이 생겨나고 있다. 100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헤어체인지’는 머리스타일을 가상으로 바꿔볼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이하 어플)이다. 길이에 따라 카테고리가 나뉘어져 있으며 약 50여 종의 머리스타일을 제공한다. 상의도 가상으로 설정할 수 있어 옷과 어울리는 머리스타일을 결정하는데도 유용하다. 이용자들은 “머리스타일을 결정할 때 어플이 도움된다”는 반응이다.

온라인 안경 쇼핑몰사이트인 ‘하루홀릭’은 가상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통해 소비자들이 보다 쉽게 안경테를 고를 수 있게 한다. 사이트에 자신의 정면사진을 업로드하고 마음에 드는 안경들을 선택하면 가상으로 안경을 착용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다. 하루홀릭 측은 “안경피팅에 관한 소비자들의 문의가 많아 이러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해니(경영 09) 학우는 “비슷한 디자인의 안경테를 가상으로 착용해보니 고민하는 시간도 줄어들고 나에게 더 잘 어울리는 디자인을 고를 수 있었다”며 “주변 친구들에게 추천해줬더니 다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고 말했다.

◆ 결정을 ‘대신’ 해드립니다
아예 결정을 대신해주는 어플들도 등장했다. 결정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어플인 ‘폴릭’은 자신의 고민을 올리면 다른 사람들이 투표하는 방식으로 대신 결정해준다. 현재 폴릭의 총 다운로드 수는 1만 건에 이르고 하루 평균 투표수도 800건에 달할 만큼 반응이 뜨겁다. 폴릭 어플 담당자 곽지혜 씨는 “‘결정하기 어려운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어플을 만들게 됐다”고 개발계기를 밝혔다. 곽 씨는 “글을 읽고, 투표하고, 결과를 보는 데까지 5초면 충분하다. 쉽고 간편하게 서로의 결정을 대신 해줄 수 있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음식점에서 먹을지도 어플이 대신 정해준다. 서울대 배달 어플 ‘샤달’은 서울대학교 주변 배달 음식점의 번호와 메뉴 정보를 제공해주는 어플로, ‘아무거나’라는 기능이 있다. 탭 바에 있는 주사위 모양의 ‘아무거나’를 클릭하면 어플에서 임의로 음식점 중 하나를 정해준다. ‘샤달’ 어플의 개발자 최석원(서울대, 자유전공학 12) 씨는 “처음 ‘아무거나’ 기능을 넣을 때는 조잡할 것 같아 고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는 많은 학우들에게 사랑받는 기능이 됐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소비자학 전공) 또한 지난 1월,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가 주최한 제 4차 글로벌 프랜차이즈 포럼에서 “샤달의 ‘아무거나’ 기능은 결정을 잘 못하는 요즘 세대를 반영하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결정장애를 겪는 현대인들을 도와주는 어플 3. 머리스타일을 가상으로 볼 수 있는 어플인 헤어체인지 4. 서울대 배달앱 샤달의 아무거나 기능 5. 안경을 쓴 모습을 가상으로 볼 수 있는 하루홀릭의 시뮬레이션 기능.

◆ 결정장애, 문제점은 없나
그렇다면 문제점은 없을까. 최 대표는 결정장애로 인해 우리사회에 크게 세 가지의 문제점이 생겼다고 꼽았다. 우선 타인을 그대로 따라하는 사고방식이 만연해졌다. 최 대표는 “본래 선택을 하려면 그 선택지에 대해 잘 알아야하고, 평가를 주체적으로 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과정을 타인에게 맡기곤 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태도는 ‘이 선택이 정상적으로 보이니까’‘이 선택이 일반적인 매뉴얼에 따른 것이니까’라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충동적으로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많은 선택지 속에서 깊은 고민을 하다 결국 충동적으로 아무거나 선택해버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이는 타인을 그대로 따라하는 사고방식과 연관이 있다. 타인의 선택에 의존한 결과, 선택에 문제가 생기면 타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최 대표는 결정장애를 겪고 있는 본교의 학우들에게는 “‘자기애’를 가지라”고 충고한다. 자기애를 갖는 것이란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 그대로를 호의적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최 대표는 “자기애가 있다면 선택이 두렵지 않다”며 “선택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삶의 주체는 본인이고, 결정의 주체 또한 본인이다. 결정장애를 가지고 있는 모두가 본인이 주인공인 삶을 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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