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바]

 

A 학우는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바로 브래지어를 벗어버리는 것. 이걸 입은 지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불편한 건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집에서만이라도 속옷을 벗고 편하게 지내고 싶지만 아빠와 오빠가 신경 쓰여 그나마도 쉽지 않다. 행여나 가슴이 보일까 헐렁한 티셔츠로 얼른 갈아입는다. 그러다 문득 A 학우는 궁금해졌다. 여자들이 브래지어를 입는 이유는 뭘까. 이 불편하기만 한 걸 말이다. 의문을 가지는 것도 잠시, 아침이 되면 어쩔 수 없이 A 학우는 벗어놨던 브래지어를 도로 입을 뿐이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일종의 관문이라고나 할까.

◆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
일평생 여성들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것이 있다. 일명 여성들의 평생 숙제라고 불리는 그것. 바로 ‘다이어트’다. “마른 여자가 아름답다” “뚱뚱한 여자는 자기관리에 실패한 사람”이라는 시선들에서 여성들의 몸은 한 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다. 안타깝게도 건강을 유지하고자 체중을 감량한다는 여성들은 보기 드물다. 그보다는 남들이 보기에 바람직한 몸매, 즉 날씬한 몸을 가지기 위해 다이어트를 택하는 이들이 많다. 운동을 하지 않고도 체지방을 분해시켜 준다는 다이어트 식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모습이나 무리한 다이어트로 섭식장애를 앓는 이들의 수가 점차 증가하는 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를 위해 그토록 다이어트에 열심인 것일까.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 독일의 여성 운동가 페트라 켈리가 했던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여성의 몸은 그들만의 소유물이 아니다’라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표면적으로 여성의 신체는 사적영역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나 엄밀히 따지면 사회적 또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장이다. 즉, 권력 관계나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에 따라 여성의 몸은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친다.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무리한 다이어트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은 차갑다. 개인적인 허영심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것은 모순적이다. 여성의 몸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요소들과 상호작용함으로써 구조화된다. 다시 말해 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규정하는 (여성들의) 몸에 대한 기준에 맞춰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변형시키는 셈이다. 이러한 공적인 요소의 강력한 영향력은 곧바로 여성들의 몸에 드러난다. 신체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침해는 다이어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렇듯 여성들은 반강제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곤 한다. 그렇다면 여성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브래지어’에 대해 한 번 알아보자.

◆ 브래지어의 탄생
한국 여성 100명 중 98명이 착용한다는 그것. 열 살 남짓부터 시작해 평생 동안 챙겨 입어야하는 그것. 바로 ‘브래지어’에 대한 이야기다. 입는 것이 자연스러워 오히려 벗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어느새 여성들에겐 ‘생활필수품’이 돼버렸다. 그런데 브래지어를 ‘찌찌가리개’라 표현하는 여성들이 등장했다. 지난달 26일 홍익대 근처에서는 ‘브라보! 노브라’ 시위가 열렸다. 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브래지어를 입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여성들의 자유’라 말했다. 가슴을 가리는 속옷을 입는 건 여성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아닌 암묵적으로 강제된 행동이라는 것. 브래지어는 여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렇기 때문에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겠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여성들은 언제부터 그리고 어떠한 이유에서 브래지어를 입기 시작한 것일까.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브래지어와 비슷한 기능을 가진 ‘아포대즘(apodesm)’이란 속옷이 존재했다. 이는 긴 천이나 가죽 밴드로 유방을 고정해 관능미를 과시하기 위해 사용됐다. 그러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코르셋이 등장했고 이후 1913년, 뉴욕 사교계의 명사 ‘메리 펠프스 제이콥스’에 의해 지금의 브래지어가 처음으로 탄생하게 됐다.

신체적 곡선을 강조해 성적인 매력을 부각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여성들이 아포대즘, 코르셋, 브래지어를 착용한 이유다. 특히 코르셋은 허리를 최대한 조여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하는데 도움을 줬다. 하지만 과도하게 몸통을 조이면서 여성들이 기절하는 사건도 심심찮게 발생했고 급기야 신체 장기가 제자리에서 이탈되거나 갈비뼈가 비뚤어지는 등 기형적인 신체를 유발하기도 했다. 브래지어도 편한 것만은 아니다. 코르셋이 신체에 가한 고통을 보다 완화시켰다곤 하지만 여성들은 브래지어를 입는 것에 대해 아직도 불편함을 호소한다. 이경화·임정란의『사춘기 소녀의 브래지어 착용실태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서울과 성남시에 거주하는 여자 중·고등생의 20.9%가 답답함, 가려움 등의 이유로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것에 불만을 드러냈다. 이밖에도 성인 여성을 비롯해 중년 여성들 역시 답답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 브래지어, 여성을 조이다
여성만의 신체적 특성을 부각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브래지어. 하지만 이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 매력을 나타내려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오히려 브래지어를 입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늘 해왔던 관행처럼 여겨진다. 이제는 가슴을 부각하기 위한 속옷이 아닌 현재는 그저 이를 가리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불편한 착용감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이 가슴을 가리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들의 가슴을 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편견이 주요한 요인이다. 브래지어를 입지 않는 것을 비정상적이고 과도한 노출이라 여기는 고정관념이 사회 저변에 자리 잡고 있다. 남성들과 달리 여성의 가슴은 노출돼선 안되며 반드시 가려져야 한다는 사회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여성의 얼굴이 남성의 욕정을 자극하고 도덕적으로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히잡’을 이슬람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이 절대적인 건 아니다. 원시부족의 여성들은 가슴을 가리지 않고 생활한다. 조선시대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구한말 서양 선교사 William W.chapin이 조선 방문 후 쓴 기사(Glimpses of Korea and China)나 신윤복의 그림 속 여성들은 가슴을 드러내놓고 있다. 당시 조선의 사회·문화적 맥락에 비춰봤을 때 가슴은 성적인 신체 부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개화가 진행된 이후 조선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브래지어를 접하게 됐다. 가슴을 성적인 신체 부위로 생각하지 않았던 우리의 문화가 브래지어의 유입으로 변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유의지가 아닌 사회적으로 강요된 다이어트와 브래지어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브래지어 역시 신체에 대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침해된 하나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편견은 여성에게 그들의 가슴을 결코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브래지어를 이용해 가려야만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몸을 억압하는 제약 앞에서 여성들은 숨죽여 순응할 뿐이다. 혹자는 브래지어를 여성 억압의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엄연히 남성과 여성은 신체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기 위해 브래지어를 만들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것도 일리가 있다. 브래지어 제품을 홍보하는 광고 속 모델은 풍만한 가슴을 보여주며 관능미를 표출한다. 또 브래지어를 여성성을 나타내는 일종의 패션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재 여성들에게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것이 온전한 ‘선택’ 사항이 아닌 ‘당연한 것’이라는 점이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에 따라 여성들의 몸이 변해야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회적인 시선에 떠밀려 브래지어를 입는 여성들의 몸에 대한 권리는 보장돼야 마땅하다.

여성들은 늘 바쁘다. 그들에게 감추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짧은 반팔이라도 입으려 하면 이번엔 겨드랑이가 신경 쓰인다. 여성의 겨드랑이 털을 자연스러운 신체부위로 바라보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비웃거나 놀림감이 되곤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털이 없는 여성의 매끈한 피부가 순수함이나 젊음의 상징으로 여겨졌는데 이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브래지어에서부터 겨드랑이 털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몸은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다. 그들은 항상 사회적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 몸을 가꾸고 변형시킨다. 여성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 이제는 당신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이 천 조각을 내 몸에 걸치는 이유는 뭘까’ ‘겨드랑이 털을 꼭 밀어야 하는 걸까’ 사회적 편견에 무조건 저항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에 대해 의식하고 이를 깨닫고 있지 않으면 자신의 몸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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