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칼럼]

두 친구가 같은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그들이 본 그림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림은 하나인데 두 사람이 생각한 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토끼 그림 어땠어?” “아냐, 내가 본 건 오리 그림이었는데” 그렇다. 그들이 본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이다.

동일한 사물에 대해서도 자신의 관점에 따라 각자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는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당연하다.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같을 순 없다.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고를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럼 이 경우는 어떤가.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무시하고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는 것. 토끼 그림일지도 모른다는 친구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리 그림이라 우기는 친구처럼 말이다.

얼마 전, 유민 아빠가 46일 만에 단식을 중단했다. 이를 두고 누구는 세월호 정국이 풀릴 수 있는 계기라 말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특별법 제정에 대해 벌써부터 희망을 논하는 것은 섣부르다 이야기한다.

어찌됐든 그는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무사히 끝냈다. 단식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에서도 벗어났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를 괴롭히는 것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온라인상에서는 유민 아빠를 둘러싼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그의 취미생활을 문제 삼는가하면 노조 조합원 신분을 근거로 그의 정치 성향을 논하기도 했다. 이는 삽시간에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문제가 불거진 사안에 대해 유민 아빠는 즉시 해명했고 정확한 사실이 아닌 내용을 보도한 언론은 질타를 면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왜 이러한 루머가 떠돌게 된 것일까. 어떤 이는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는 이들의 소행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근본적 원인은 나와 다른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에 대입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비록 내가 그림 속에서 본 것은 ‘오리’이지만 다른 방향에서보면 ‘토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끝까지 ‘오리’를 고집하는 이들에게 한 번 말해본다. 다른 한 쪽의 입장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가지고 바라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한 순간에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어떤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을지 말이다. 그러면 알게 되지 않을까. 유민 아빠의 진심을.
 

저작권자 © 숙대신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