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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그의 74년은 대한민국이었다
문혜영 기자  |  smpmhy87@s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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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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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9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던 국치일이었다. 104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가 현재의 모습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애썼던 독립열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독립열사들의 중심에는 김구 선생이 있었다. 국치일을 맞아 백범일지를 통해 바라본 김구 선생의 일생을 정리해 봤다.

백범일지는 김구가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된 1928년부터 쓰기 시작한 자서전이다. 백범일지는 크게 상, 하권으로 나뉜다. 상권은 자식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남기는 유서형식이고, 하권은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 뒤 중국에서의 피신생활과 독립운동에서부터 광복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1876년 8월 29일 해주 텃골에서 김창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소년이 태어났다. 그 소년은 아버지의 수저를 두 동강 내 엿장수와 엿을 바꾸어 먹어 아버지께 크게 혼나곤 했다. 이 개구쟁이 소년이 바로 백범 김구이다. 과거급제를 꿈꾸며 글공부를 했던 김구는 과거시험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서당공부를 그만뒀다. 대신 풍수와 관상 서적을 흥미롭게 공부했다. 그러나 관상 서적에서 알아본 김구의 관상은 매우 형편없었다. 김구는 관상 서적 속에서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구절을 읽고 자신의 관상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될 것을 다짐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을 당시 김구의 일본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복수를 위해 김구는 배 안에서 조선인으로 위장하고 있는 일본인을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구는 감옥에 가게 된다. 그의 맹렬한 면모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투옥됐을 당시 법정에서 감시하고 있던 일본인 순사를 향해 “이놈!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살면 몸으로,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으리라!”고 소리를 지르는 용맹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구는 비밀 조직 단체 신민회의 일원으로서 국권회복을 위해 애썼다. 그러던 중 안명근이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된 안악사건이 일어난다. 안악사건은 신민회 당원들을 체포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사건이다. 여기에 김구도 함께 휘말리게 되면서 그는 또다시 감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곳에서 모두가 알고 있는 김구의 이름이 탄생하게 되는데 김구는 백정(白丁) 백과 범부(凡夫) 범을 딴 호를 사용했다. 새로운 이름을 통해 그는 모든 국민들이 자신만큼의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김구와 관련해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건 중 하나가 한인 애국단 대원인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활동이다. 김구가 임시정부 재무부장일 당시 이봉창이라는 젊은 청년이 독립운동을 하고 싶다며 그를 찾아왔다. 김구와 이봉창은 폭탄을 이용해 천황을 살해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후 김구는 윤봉길을 만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윤봉길 하면 도시락 폭탄을 생각하지만 그 내막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윤봉길은 김구와 함께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경축식에서 물통과 도시락 속에 폭탄을 넣어 던지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실제로 윤봉길이 던진 폭탄은 물통 폭탄이다. 물통 폭탄은 기념식장 단상에 떨어졌고, 많은 고위직 인사들이 즉사하거나 중상을 입게 됐다. 이 사건으로 잠시 주춤했던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정이 다시 불타오르게 됐고, 세계에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김구는 중국 각지를 옮겨 다니며 자주독립을 위한 체계적인 준비를 했다. 그는 미국과의 연합을 통해 군인들을 양성하고 특수훈련을 진행했다. 이 군인들을 한국광복군이라 부르며 이들은 일본과 맞설 날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됐고 그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로써 백범일지의 상, 하권이 마무리되고 마지막에는 <나의 소원>이라는 제목으로 김구의 사상과 이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본문에서 김구는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여야 한다.”고 말한다. 김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여러 모습들이 한데 어우러질 때 인류의 가장 높은 문화가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며 우리나라가 문화의 힘을 길러서 궁극적으로 세계의 평화가 실현되기를 염원했다.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김구는 대한민국이 독립한지 4년밖에 안 된 1949년 6월 26일에 안두희 포병 소위에 의해 피살되어 74세의 나이에 다사다난했던 인생의 막을 내린다.

김구가 우리나라의 광복을 위해 누구보다 애썼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챙기지 못했다는 엇갈린 평가도 존재한다. 김구는 “가족은 떠나도 임시정부는 떠나지 못합니다.”고 말했을 정도로 나라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임종조차 지켜볼 수 없었다. 어머니의 지극정성인 사랑에도 보답하지 못하고 떠나보냈고, 자식들과 정을 붙일 시간도 부족했다.

공자의 말씀 중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는 한자성어가 있다. 이는 작은 것부터 챙기고 다스린 이후에 큰 것을 이뤄야 한다는 뜻이다. 김구가 가정적인 남편이나 따뜻한 아버지가 되지는 못했으므로 공자의 말에 따르면 실패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가 남긴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통해 현대인들은 지금까지도 그의 독립에 대한 열정과 애국심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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