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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들려온 “대한 독립 만세!”
구민경 기자  |  smpkmk85@sookmyu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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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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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주최한 <2014 중국 백범유적탐방>에서 총 33명의 탐방단이 중국으로 향했다. 기자는 대학생 탐방단원으로 함께 참여했다. 서울에서의 1박을 포함해 총 6박 7일(7/25~7/30) 동안 백범 김구 선생님의 발자취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고된 여정을 따라가 봤다.


◆ 중국 1일 차 - 상하이
7월 25일 오전 10시 50분, 부푼 마음을 안고 상하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날부터 내린 비로 비행기가 뜰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연착 없이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상하이 푸동공항 까지는 비행기로 약 2시간 거리, 점심은 기내식으로 대체했다.

푸동공항에서 보경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황푸강을 따라 고속도로를 내달리다 보면 2, 3층의 멋진 양옥집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중국의 워낙 기온이 높고 습하기 때문에 1층은 비워두고 주로 2, 3층에 사람들이 거주한다.

보경리 임정 청사로 들어가는 길은 매우 번화하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쭉 이어진 도로변과 고급스러운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는 신사동 가로수 길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50m 정도 걸어가다 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라는 팻말과 함께 청사 건물이 나온다. 보경리 임정 청사는 1926년부터 1932년 윤봉길 의거까지 사용했던 청사다. 주방과 화장실을 비롯해 집무실과 침실까지 모두 협소한 편이다. 입장료는 1인 20위안, 한국 돈으로 3,500원 정도다.

신규식, 박은식, 안태국, 노백린, 김인전 총 5분의 임정 요인들의 묘가 안치된 만국공묘를 지나 상하이의 중심 외탄 공원에 도착했다. 외탄 공원은 의열단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성륜과 김익상이 일본 육군대장 다나까를 처단하려고 시도했던 의거 장소다. 동시에 상하이의 가장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과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크고 웅장한 건물들이 널찍널찍하게 떨어져 있어서 건물 각각의 존재감이 크다. 도시를 휘감는 황푸강에는 유람선이 지나가고 강 건너편에는 연필처럼 생긴 동방명주(사진1)의 모습도 보인다.

   
▲ 사진1. 상하이의 랜드마크 동방명주 타워, 468m의 텔레비전탑으로 서울타워의 2배 높이다.

외탄공원 옆 외백도교를 사이에 두고 프랑스 조계와 일본 조계가 나뉘는데, 조계지는 그 나라의 치외법권을 허용하는 구역을 말한다. 독립운동가들은 그나마 일본인들의 감시가 덜했던 프랑스 조계에서 머물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겉보기에는 화려한 상하이의 모습이지만 그 이면에는 이역만리에서 피땀을 흘리며 고생했을 독립투사들의 모습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훙커우 공원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앞이라도 지나려고 했지만 공사 중이어서 다음을 기약했다.


◆ 중국 2일 차 - 자싱·하이옌, 항저우
상하이에 있는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아침 자싱으로 출발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김구 선생님과 임정 요원들은 일본군에게 쫓기게 된다. 임정은 항저우로 옮기게 되고 한인 애국단을 조직한 김구 선생에게는 60만원이라는 현상금이 걸렸다. 현 시가로 약 200억 원 정도다. 김구 선생이 피난해 있었던 자싱 피난처(사진2)는 현재 기념관 형태로 바뀌었다.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해서 당시의 상황을 눈에 그려보기 좋다. 김구 선생은 주로 2층에서 숨어 지냈다. 안주인이 빨래를 걸어놓으면 위험하니 들어오지 말라는 신호였고 별채 뒤편에는 호수가 있어 위급 상황 시 배를 타고 피신할 수 있었다.

   
▲ 사진2. 자싱 피난처, 건물 뒤쪽에 호수가 있어 빠른 피신이 가능하다.

김구 선생의 두 번째 피난처인 하이옌 재청별장으로 가기 전 근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외국인 입맛에 맞춘 상하이 음식과는 달리 자싱에서는 향신료 향이 강한 현지 요리를 먹게 됐다(사진3). 중국 요리는 대부분 동그란 회전식탁에서 먹는다. 각각의 음식이 놓인 식탁을 돌리면서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앞 접시에 먹을 만큼 덜어서 먹는 구조다. 대부분 맛있게 먹었지만 모든 요리가 기름진 탓에 매콤한 김치가 자꾸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사진3. 간장에 졸여 만든 오겹살 돼지찜 요리 동파육

자싱과 하이옌을 뒤로하고 항저우로 이동하는 내내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서호 관람을 위해 유람선을 타고 이동하던 중 비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결국 서호 관람을 미처 다 하지 못하고 배는 돌아왔고, 그 사이 도시는 물난리가 났다. 항저우는 경치가 좋고 거리가 깔끔한 도시로 유명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물난리에 항저우도 속수무책으로 잠겼다. 사람들이 비를 피해 시내버스에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들어섰다. 그 버스에 억지로 타려는 아주머니와 버스기사 간의 실랑이가 마치 60년대 우리나라 모습을 보는 듯했다.

청태 제2여사 임정 청사와 오복리 임정 요인 거주지는 갑작스러운 폭우로 시간이 많이 지체돼 가지 못했고 어둑어둑 해 질 무렵에야 호변촌 임정 청사에 들어섰다. 예정된 시간보다 많이 늦게 도착했음에도 모든 직원들이 퇴근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탐방단을 반겨주기 위함과 독립운동 역사에 대해 더 배우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임정 직원들은 비를 맞은 우리를 위해 따듯한 차를 끓여 주었다. 따듯한 차의 온기가 호변촌 임정 청사를 훈훈하게 뒤덮었다.


◆ 중국 3일 차 - 난징
아침 8시 30분, 난징 가는 고속철도를 타기 위해 나왔다. 땅이 워낙 큰 탓에 중국인들은 기차를 많이 이용한다. 항저우에서 난징까지 거리는 256km, 가격은 117.5위안(약 2만원)이다. 약 1시간 정도 고속철도를 타고 난징에 도착했다. 첫 일정은 난징대학살 기념관, 규모부터 사람을 압도한다. 입장료가 무료인 덕분에 큰 규모의 기념관이 사람들로 빽빽하다. 1937년 12월부터 1938년 1월까지 이뤄진 일본군의 대량 살상으로 인해 약 3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난징 대학살 당시 유골이 발견된 장소에 세워졌다. 이곳에서 일제의 잔학성을 가감 없이 볼 수 있다. 아쉽게도 사진촬영은 불가능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가 중일전쟁 당시 희생된 공군 장병들과 미국 및 소련 교관, 비행사들의 유해를 모아놓은 항공열사공묘. 이곳에는 백범 김구 선생 계열의 학생훈련소 대원이었던 김원영과 민족혁명당 출신의 전상국, 두 명의 한인 유해가 모셔져 있다. 유리 벽 보수공사로 인해 기념관은 폐쇄됐지만 묘비석에 쓰인 두 한인의 이름을 보며 그들을 추모했다.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난징을 수도로 삼고 있을 때 사용하던 총통부를 거쳐 난징시 바이샤구에 위치한 임정 주화대표단 본부에 도착했다. 임정 주화대표단은 광복 후 임정이 환국한 이후 사무 처리와 한인 교포들의 귀국 문제 등을 처리하던 기구였다. 현재는 이 집을 개인이 소유하고 있어 출입하지 못해 입구에서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던 중, 공안차 한 대가 들어섰고 공안 두 명이 내렸다. 좁은 골목길에는 일순간 긴장감이 돌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단순히 순찰을 하다 들른 것이었다.


◆ 중국 4일 차 - 창사
넷째 날은 그야말로 이동의 날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7시 42분 고속철도를 타고 난징에서 창사까지 5시간 동안 878km에 달하는 거리를 달렸다. 가격은 333위안(약 5만 5천원). 서울-부산을 왕복하는 긴 거리를 이동한 것이다. 지난 3일 내내 비가 내린 것과 달리 창사는 해가 쨍쨍했다. 그러나 숨 막히는 무더위도 함께 견뎌야 했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습도와 온도 때문에 일사병 증세가 나타나서 관람을 잠시 쉬었다. 창사의 더위에 된통 데인 탓에 차라리 비오는 항저우가 그리울 정도였다. 

창사의 무더위에 익숙해질 틈도 없이 남목청으로 향했다. 중일전쟁 이후 임정과 독립운동 주요 인물들은 항저우, 난징 등 각지에서 창사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김구 선생님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진영의 통합 운동이 추진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김구 선생이 혁명단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장소가 바로 남목청이다. 김구 선생은 이후 상아 의원에서 약 한 달간 입원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김구 선생이 입원했던 상아의원 건물은 현재 보수공사 중이었다.

중국을 다니는 동안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중국 아기들은 가랑이가 터진 바지를 입고 다닌다는 것. 하나같이 엉덩이 부분이 훤한 것이 귀여우면서도 우습다. 중국에서는 대소변을 잘 가리지 못하는 아이들의 배변훈련을 위해 구멍바지를 입힌다고 한다. 또 이렇게 습하고 무더운 중국 날씨에 기저귀를 입히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매우 괴로운 일일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식당인 서호루(사진4)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창사공항으로 이동해 충칭공항까지 중국 국내 항공편으로 이동했다. 좁고 불편했지만 운 좋게도 창가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에 푹 빠져 1시간의 비행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 사진4. 세계에서 가장 큰 식당인 서호루, 최대 5,0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다

 


◆ 중국 5일 차 - 충칭
창사에서 엄청난 무더위에 한번 데였던 탓일까. 가장 더울 것이라고 예상했던 충칭은 생각보다 선선했다. 비록 햇볕은 따가웠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그래도 땀은 식힐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충칭시 치장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치장박물관. 산꼭대기에 위치한 치장박물관에서 치장의 모습을 바라보니, S자로 휘감는 강과 가지런히 정렬된 집들이 참 편안하고 살기 좋은 동네임을 짐작게 했다. 치장박물관의 한쪽 코너에는 충칭에서 머물렀던 임정 요인들의 이야기가 나와 있다. 상하이에서 충칭까지의 활동상과 이동 경로 등이 전시돼 있어 치장에서 대한민국 임정이 가지는 위치를 잘 알 수 있다.

치장박물관에서 내려오면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이동녕 선생 옛집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건물 벽에 이동녕 거주 유적지라는 표지판이 없었다면 그저 폐가라고밖에 볼 수 없는 형상이었다. 터라고 추정되는 곳에 허물어진 벽들과 무성한 풀숲 때문에 안쪽으로 들어가기조차 힘들었다.

충칭 유중구는 마치 한국의 명동을 보는 것처럼 백화점들과 명품관이 들어서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꽤 한산하다는 것. 어딜 가나 사람 많기로 소문난 중국인데 왜 사람들이 적을까. 중국 사람들은 점심을 먹고 난 오후 시간에 낮잠을 즐긴다고 한다. 길 한편에 노점상을 내놓은 아저씨도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한산한 번화가를 지나 한 음식점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대한민국 임정의 군대였던 한국광복군의 총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현재는 그 자리에 일반 음식점이 세워졌고 그 자취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5박 6일간의 중국 대장정은 연화지 임정 청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곳은 1940년 9월 충칭으로 임정이 옮긴 뒤 1945년 11월 3일 환국하기 전까지 임정 요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지금까지 봐 왔던 임정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또 방마다 용도가 정해져 있어 체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임정요원들이 환국하기 전 단체 사진을 찍었던 청사의 계단(사진5)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69년이 지난 지금, 그 자리에서 서 있는 감회가 새롭다.

   
▲ 사진5. 광복 후 임정 요원들이 마지막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던 충칭 연화지 임정 청사의 계단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이라는 긴 고난의 여정을 닷새로 줄이기에는 너무나 짧았다. 보존 상태가 완벽한 곳도 있는 반면 그 자취를 알아볼 수 없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교과서에서나 봤던 독립운동의 역사를 몸으로 체험하는 것은 책 속에서 보는 것 이상의 감동으로 다가온다. 탐방단장이었던 단국대학교 역사학과 한시준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작은 새싹이 아름드리 숲이 되듯 중국에서의 임시정부 활동이 현재 대한민국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 작은 것 하나도 의미가 크다.” 과거의 역사를 거울삼아 현재의 나를 돌아보고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는 것이 역사 공부의 참뜻이 아닐까. 볼거리 놀 거리 많은 중국이지만 그 속에서 아픈 우리 역사의 현장을 되감아 체험해 보는 여정도 결코 시간 낭비는 아닐 것이다.

<사진=탐방단원 김수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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