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칼럼]

함께 어우러지는 삶을 향한 다짐

 

 

 

어떻게 살 것인가. 몇 주째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는 화두다. 슬픔과 당혹감, 분노, 무력감 여러 층위의 감정이 번갈아가며 일었다. 무력감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던 시간이 지나고,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그리고 남겨진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묵직한 고민이다. 21세기 한국사회를 나는,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이해가 수반돼야 한다. 직업의식과 사명감의 부재,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 부족, 물질만능주의, 원가절감을 위한 무분별한 규제완화, 여러 방면으로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와 이분법적 대립… 모든 문제의 기저에는 자본주의가 깔려있다. 모두가 잘 살게 될 것이라는 아담 스미스의 예언도 빗나가고, 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가 무너질 것이라는 칼 마르크스의 예언도 빗나갔다. 정부가 규제해야 한다는 케인스의 주장도, 시장을 믿어야 한다는 하이에크의 주장도 적절한 해결책이 되진 못했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여러 노력이 있었지만 여전히 자본주의의 수많은 문제점은 남아 있거나 오히려 심화됐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봉건제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올바른 이해를 통해 자본주의를 수정하고 변화시키면서 ‘함께 잘 살 수 있는’ 자본주의를 고민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문제를 고민할 때, 책은 좋은 대화상대가 된다. 특히 고전이 그러하다.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았지만 인간이 지닌 고민에는 공통점이 많다. 18세기를 살았던 루소의 고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평등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루소는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라고 말한다. 이렇게 생겨난 ‘소유’ 관념이 불평등의 시초가 됐고, 불평등은 모든 불평과 악의 원천으로, 불행의 단초로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루소는 본래 평등했던 인간이 어떻게 불평등의 길로 들어섰는지 탐구하며, 인간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유를 ‘불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어린애가 노인에게 명령하고 바보가 현명한 사람을 이끌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줌의 사람들에게서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상황을 고발하며 루소는 문명인의 삶을 불행한 것으로 진단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시대를 살아내야 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불평등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수긍하며, 20%의 소수가 80%의 부를 누리는 이른바 ‘20 대 80의 사회’에서 20에 들기 위해 애쓸 것인가. 누구나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함께 어우러지는 삶과 세상을 위해 애쓸 것인가. 답의 방향은 좀 더 확고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언행이 넘쳐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느 자리에서나 원칙과 신념을 지켜낼 수 있는 견고하고 다부진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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