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매화
길거리에 놓인 벤치에 사는 여자 거지

윤소영 (중앙여자고등학교)

햇빛이 신문지 구멍 사이로 침입해 들어와 내 얼굴을 두들겨 대고 있었다. 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태양 시계는 거의 정확하다. 12시에서 1시사이가 되면 녹슬지 않는 그 솜씨로 나를 깨워 주는 것이다.
간밤에 덮고 잔 신문지가 찢어져 있었다. 하긴 이불을 바꿔줄 때가 되었긴 했다.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라도 들려야 할 것 같다. 나는 무료 급식소를 향해 미적미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거리는 꽤 마음에 드는 장소다. 한눈에 시간을 알아볼 수 있는 거대한 시계탑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길거리의 가장자리에 가게들이 줄지어 있어 볼거리가 많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물론 이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새내기들에게 이 거리가 사람이 많다는 점은 치명적이겠지만, 나 같은 베테랑에게는 별 문제, 아니 오히려 구경거리가 많아 선호하는 지역인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거리의 벤치는 정말 멋진 침대다.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등이 서 있고 그 아래마다 벤치가 앉아 있는 그런 구조인데, 또 그 옆마다 작은 화단이 놓여져 있는 것이 제법 운치가 있다. 벤치는 분홍색의 화려한 무늬가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지하철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분을 느끼게 한달까.
굴러다니는 신문지 조각과 사뭇 다정한 듯 걸어가는 연인들,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통과 교복입은 학생들을 지나쳐서 무료 급식소에 도착한 나는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어여. 이씨. 오랜만이네.”
“김씨. 아직도 살아 있었구만.”
낡을대로 낡은 퍼런 츄리닝을 입은 이씨는 짓궂게 웃었다.
이씨는 지하철 의자에서 살 때 만난 사이이다. 지금은 내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 덕에 몇주만에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이씨는 전에 무슨 이릉ㄹ 했었는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툭툭 내뱉곤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버릇은 여전한 것 같다. 그는 식탁 반대편에 앉은 ‘아직 옷이 깨끗한’ 새내기들에게 설교를 해대고 있었다. 그 새내기들은 급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는 듯 하지만.
“그러니까 말이지, 우리는 걸려 넘어진 자들에 해당하는 거야! 냇물의 한복판에 박혀서 물살을 우린 따라가지 못하고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자면 그들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것을 놓치고 있는 셈이야.”
“그러니까 그게 뭔데?”
“ ……”
이씨의 개똥철학은 항상 이 부분에서 끝나곤 해다. 그는 발끈하면서 ‘그러니까 그걸 찾아야 한다고!’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항상 그 이상의 진전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새내기들의 무덤덤한 반응에 이씨는 잔뜩 풀이 죽어서 한숨 잔다며 돌아가 버렸고, 나도 누가 쌓아 놓은 폐휴지 중 한 장을 집어 들고 집으로 향했다.
내가 애용하는 벤치에 손님이 와 있었다.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옷을 입고 긴 머리채를 늘어 뜨리고 그늘 아래에서 양산을 쓰고 있는 여자였다.
“저 여자. 또 온건가.”
나는 쯧쯧 혀를 차면서 반대편 벤치에 앉았다. 옆에 동전을 넣는 바구니를 놓고 장사를 시작하면서 그 여자를 관찰했다. 
저 여자는 내가 이 곳에 이사온 날부터 알고 있었다. 대충 이 시간쯤 되면 햇빛이 없는 날이어도 꼭꼭 양산을 쓰고 저 벤치 저 위치에 앉았다. 처음엔 누굴 기다리는가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매일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 약속이 매일 깨지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근는 얼마쯤 지나면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을 보아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제 단순히 산책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여자의 옷은 매일 다르다. 어제는 흰색과 붉은색으로 윗옷과 스커트를 맞춘 옷이었다. 반지와 목걸이, 귀걸이도 세트로 몇 개는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양산도, 내가 알고 있는 무늬도 서너개는 된다. 어느 부잣집의 아가씨라도 되는 걸까.
문득 그 여자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내가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여자의 시선에 혐오감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내 몰골을 잠깐 내려다 보았다. 언제 갈아 입었는지 기억도 안나는 티셔츠에 시커먼 다리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반바지. 나는 그녀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보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산을 우아하게 두 손으로 받쳐들고, 가게 구경이라도 할 yfid인지 또각또각 걸어간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사람들의 질투와 부러움이 남았다. 그녀의 자수정 반지를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여자아이, 난처한 듯 여자를 잡아 끄는 남자, 멋진 몸매를 부러워하는 사람들. 그녀는 어떤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한 악세사리 점으로 걸어들어갔다.
그 사이 나는 장사를 개시했다.
첫 번째 손님인 것이다.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부모님께 받은 동전을 내 바구니에 넣어주었다. 그 작은 손이 굉장히 귀여워서 나는 빙긋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꼬마는 헤헤 웃으며 부모님께로 달려갔다.
백원짜리 동전 하나에 그 귀여운 꼬마를 떠올리고 있을 때 여자가 악세사리점에서 나왔다. 보라색 보석이 박힌 팔찌가 걸려 있었다. 여자는 잠시 가게 사이를 서성거리다가 벤치로 돌아와 앉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며 앉아있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야 돈을 벌기 위해 앉아 있는 것이니 할 일이 있다고 쳐도, 저 여자는 뭐란 말인가? 거리 한 가운데 벤치에 바위처럼 박혀서는 무슨 할 일이 있어보이는 것도 아니고……. 순간 나는 그 여자가 불쌍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홍색 칠이 다 벗겨져 녹슬고 낡은 벤치 위에 사는 그 여자는 정말 불쌍하다.
나는 바구니에 있는 동전 하나를 집어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혐오감과 호기심을 섞은 눈길을 나에게 보내왔고, 나는 동전을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 동전을 준 꼬마 아가씨를 떠올리면서 그녀가 내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리기 전에 나는 그 거리를 떠났다. 오늘은 달이 밝을 것 같으니 이씨한테 소주나 얻어 마셔 볼까 하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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