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천민과 왕이 서로 계급이 뒤바뀌어 생활하는 일이 가능할까? 최근 이와 같은 내용으로 광해군을 그린 <광해>,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담은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 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극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와 동시에 작품에 등장하는 왕의 모습이 실제 역사와 일치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실증주의를 추구하는 정통사극의 인기가 시들고 창의성을 중시하는 퓨전사극이 등장하면서 사극의 역사고증문제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정통사극과 퓨전사극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점차 심화되고 있는 역사고증 문제를 들여다보자.

 

▲ <사진출처=네이버>

 

#브라운관과 스크린에 불어온 사극 열풍

  2011년 하반기에 방영된 SBS <뿌리 깊은 나무>와 올해 초에 방영된 MBC <해를 품은 달>이 각각 마지막 회 시청률 25.4%, 42.2%를 기록하며 브라운관에는 또 다른 사극 열풍이 생겨났다. 이 열기를 타고 <옥탑방 왕세자>, <무신>, <닥터진> 등이 방영됐으며 하반기에도 <신의>, <아랑사또전>, <대풍수>등 일주일 내내 공중파에서 사극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작품이 방영되고 있다. 사극의 인기는 브라운관뿐만 아니라 스크린에도 이어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 이미 많은 사극 영화가 개봉됐고 현재 <광해>는 1000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다. 또 앞으로도 <관상>, <현의 노래>등의 작품이 개봉 예정이다.

  그러나 사실 사극은 다른 장르보다 무대세트, 의상, 미술소품 등에 필요한 많은 기본 제작비와 역사 고증의 문제로 위험성이 큰 장르로 인식돼왔다. 무엇보다 사극은 지루하다는 편견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사극, 특히 <해를 품은 달>과 같은 퓨전사극이 인기 장르로 자리 잡았다. 퓨전사극이 등장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로 그 전에는 정통사극이 사극의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현재는 퓨전사극이 정통사극보다 더 많이 제작되고 있다. 그 배경을 알기위해서는 우선 정통사극과 퓨전사극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정통사극의 쇠퇴와 퓨전사극의 등장

  정통사극은 국내 최초로 1964년에 방영된 TV사극 <국토만리>를 시작으로 고증과 격식을 갖추려는 사극을 일컫는다. 비교적 객관적인 역사 사실을 근거로 제작되며, 정치사극과 전쟁사극으로 분류된다. 정치사극은 궁궐 여인들의 애정과 암투를 다루거나 왕실과 조정 갈등을 다루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장희빈>, <여인천하>가 있다. 전쟁사극은 전쟁이 주된 내용으로 <태조 왕건>, <연개소문> 등이 대표적이다.

  퓨전사극은 실증주의적인 정통사극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소재와 독창적인 내용으로 제작한 극을 말한다. 1999년 방영된 <허준>이 그 시초라 할 수 있으며, 역사적 배경을 빌려 현대·판타지적 요소를 융합시킨 것이 특징이다. 또 천민출신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대장금>이나 추노꾼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추노>처럼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나 민중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이 기존의 정통사극과 다른 점이다.

  퓨전사극이 인기를 끌게 된 것은 기존의 정통사극의 고질적인 문제를 타파한 데 있다. 정통사극은 지루하고 느린 전개, 인기 소재가 반복된다는 지적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정통사극 특유의 느린 전개방식은 사극을 중?장년층의 전유물로 여기게 하고, 젊은 여성 시청자의 외면을 받는 원인이 됐다. 또 단종과 세조, 연산군, 정조, 명성황후 등 흥행했던 소재가 반복돼 식상함을 느끼게 했다. 그 결과 정통사극의 인기가 시들었고, 정통사극의 쇠퇴와 퓨전사극의 등장을 불러왔다.

#반복되는 사극의 역사고증 문제

  그러나 퓨전 사극은 역사적 고증이 적기 때문에 역사와 관계성이 떨어지는 작품을 사극으로 봐야 되는가에 대한 문제점이 있다. 대부분의 퓨전사극은 기본적인 고증조차 따르지 않고 정체불명의 의상, 건축물을 배경으로 극을 제작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 그 예로 2007년 방영된 <태왕사신기>의 경우 시대배경인 고구려와 상관없는 의상과 스토리를 보여줬으며, 2008년 방영된 <바람의 화원>에서는 신윤복이 여성으로 등장해 시청자들에게 혼동을 줬다. 또 2011년 방영된 <공주의 남자>는 신숙주와 아들 그리고 자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령 신씨 문중이 KBS를 제소, 법정시비를 빚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역사 고증 문제는 퓨전사극과 정통사극의 공통된 문제점으로, 정통사극에서도 역사적 고증 부실과 왜곡문제가 계속 지적돼 왔다.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작가들이 사극 제작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거나, 사학자의 고증 참여가 부족한 상태로 사극을 제작하기 때문이다.

#왕의 재현방식을 통해 바라본 사극

  사극에서 주된 소재인 왕의 모습을 통해서도 역사 고증의 문제는 확연하게 드러난다. 1964년부터 2010년까지 방영된 역사적 인물을 다룬 사극 151편중에서 왕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87편으로 58%에 해당한다. 다른 인물보다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객관적인 사료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왕은 한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 인물로 극중에서 재현되는 왕의 모습은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게다가 민족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영웅적 인물과 실패한 왕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적 교훈을 전달하기에도 적절하다. 따라서 왕을 주제로 한 사극은 다른 직업을 가진 인물을 그린 사극보다 시청자의 역사인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게 중요한 소재인 왕의 역사는 사극의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다양한 재현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1983년에 방영된 <추동궁 마마>와 1996년에 방영된 <용의 눈물>, 2008년에 방영된 <대왕 세종>은 모두 조선 개국기를 다룬 대표적인 드라마이다. 이 세 드라마에서 그린 태조 이성계,태종 이방원의 모습은 각각 다르다. <추동궁 마마>에서는 왕을 운명적 존재로 표현했지만, <용의 눈물>과 <대왕 세종>은 왕을 왕이 되기 위한 강력한 의지를 가진 욕망의 존재로 그려냈다. 이는 왕이 운명을 타고나는 전근대적 인간상에서 자신의 꿈과 욕망을 추구하는 근대적 인간상으로 변화됨을 보여준다. 또한 통치방식에서도 조작과 술수를 사용하는 전근대적인 방식에서 대화와 타협의 방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표현된다. 이러한 변화는 현대에 맞는 왕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역사와 지나치게 달라 비판 받기도 했다. 태종은 조선의 왕권을 안정화하기 위해 혈육과 친구를 모두 베어버릴 만큼 강력한 군왕이었기 때문에 민주정치의 시대로 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켜져야 할 실증과 창조의 경계

  이렇게 사극의 실증적인 부분과 창조적인 부분의 모호한 경계는 계속해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각색된 역사에 대해 명시하지 않을 시에 역사를 잘 모르는 시청자들은 작품에 나오는 역사를 정사로 인식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완전한 정통사극도 아니고 퓨전사극도 아닌, 정체성이 애매한 사극들의 존재도 논란이 됐다. 대표적으로 2006년 제작된 <주몽>과 2009년 방영된 <선덕여왕>은 퓨전사극을 표방하였지만 정통사극의 특징을 융합해 많은 부분이 왜곡되는 문제가 있었다.

  1960년대에 등단하여 <조선왕조 500년>, <왕건> 등을 집필한 시나리오작가협회장 신봉승 작가는 개인 공식 홈페이지에‘역사의 왜곡과 훼손’이라는 제목으로 사극의 역사왜곡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역사드라마 작가는 사서에 적힌 문자보다는 그 행간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면서“역사를 잘못 읽으면 민족의 자긍심을 손상하게 되는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고 훼손하면 국민정서를 해치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는‘사실’과 얼마간 다를 수가 있겠지만, 그 시대가 지닌‘시대정신’은 달라서는 안 되고, 왜곡돼서는 더욱 안 된다”고 강조했다. 현재 사극은 형식과 소재가 다양해지며 기존의 틀을 넘어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변모하는 사극 속에서 매번 다른 모습으로 재현되는 우리의 역사는 여전히 실증과 허구의 경계 사이에서 저울질 되고 있다.

 

 

 

<참고문헌>

1.정통사극과 퓨전사극의 문제점 및 특징으로 인한 발전방안과 전망에 관한 연구, 조인희,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 2011

2.TV 역사드라마 속 왕의 재현방식 변화 : 드라마 제작 내부자 관점에서, 박경진,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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