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 다루는 사진작가

1991년, 일본에 끌려가서 강제로 성노예가 돼야했던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발표됐다. “당시에 굉장히 큰 이슈였어요. 사회는 분노로 들끓었고, 저 또한 분노했었죠. 너무나 안타까웠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대야 할지도 몰랐어요.” 그러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에게 1996년 월간 사회평론 ‘길’ 화보취재로 나눔의 집을 방문할 일이 생긴 것이다. “할머니들을 취재할 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막막했어요. 어떤 말을 해도 실례가 될 것 같았고, 할머니들께 상처가 될 것 같았거든요. 제가 남자라는 사실이 할머니들께 한없이 죄송했죠.”

그는 3년 동안 나눔의 집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할머니들로부터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할머니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자원봉사 활동 외에 전국 각지에 남아계신 할머니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할머니들께 들었던 내용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하고 안타까웠어요. 할머니들의 눈을 통해 본 전쟁은 지옥 그 자체였죠.” 그러던 중, 그는 중국에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남겨진 것을 알게됐다. 그때부터 한국정신대연구소와 함께 중국에 남겨지신 할머니들을 찾는 일과 실태조사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과 동시에 그는 사진작가로서 소명을 잊지 않고 홀로 중국을 오가며 할머니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선 할머니들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는데 있어서 선행돼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것은 제가 할머니들을 위해 할수 있는 최선의 일이기도 했어요.” 그는 사진전을 개최하는 것은 물론 조여권, 한지현 등의 사진작가들과 일본군 위안부 사진집을 출판하는 등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위해 여러 방면에서 힘썼다. 또한 중국에 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국적 회복을 위한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제가 한 일중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거에요. 이 프로젝트를 통해 할머니들이 몇 십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실 수 있게 됐죠. 한국 국적을 취득함과 동시에 국가의 지원도 받을 수 있게 됐어요.” 그는 사진전을 통해 할머니들의 안타까움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실질적인 도움도 꼭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겹겹 프로젝트의 시작

겹겹프로젝트는 그가 90년대부터 시작한 위안부 사진전이다. “겹겹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어요. 겹겹이 층을 이룬 할머니들의 깊게 패인 주름을 상징함과 동시에 70여 년 동안 가슴에 쌓여 온 과거부터 현재까지 겹겹이 풀리지 않는 한을 의미해요. 여러 사람들의 관심이 겹겹이 쌓여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기를 소망하는 뜻도 담고 있죠.” 그는 지난 6월 26일, 도쿄에서 첫 번째 겹겹 프로젝트 사진전을 갖었다. 그러나 사진전이 진행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는 그 때를 회상하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 했다. 6월 26일 예정됐던 도쿄살롱에서의 사진전이 전시를 한달 남겨놓은 상황에서 니콘이 일방적으로 취소 통보를 한 것이다. 그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다행히 법원은 안작가의 손을 들어줬다. 사진전을 취소하라고 명령한 배경에는 미쯔비시가 있었다. “사진전은 우익에 의해 중단된 것이 아니에요. 우익은 들러리에 불과하죠. 미쯔비시는 유명한 전범기업이고, 니콘은 그 회사의 자회사에요. 니콘 또한 전쟁 당시 군수광학 렌즈를 전문적으로 만들던 곳이었죠. 전범기업인 미쯔비시가 사진전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힘들게 전시는 열었지만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니콘 측에서 직원을 고용해 전시회를 감시하며 사진전을 중지시킬 기회를 노렸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전시를 철회할 수 있다는 협박아래 시작된 전시는 과도한 경비를 통한 관람객의 인권침해는 기본이고, 작가의 활동을 관객에게 설명하는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 진행됐다. “니콘 측에서는 변호사와 직원들을 동원해 촬영과 모든 대화들을 녹음했어요. 관객들의 몸수색도 서슴치 않았죠. 심지어 이 전시회를 주최한 저도 촬영이 안될만큼 감시가 심했어요.” 그렇게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8000여명이 사진전을 찾았다. 관람객의 약 95%가 일본인이었다. 이 중 20대~30대의 비율은 40%에 달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과거 역사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실제로 이 전시회가 끝난 후 겹겹 프로젝트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죠.” 물론 이 전시에 위안부 문제 해결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만 온 것은 아니었다. 이 전시회 자체를 반대하는 우익들의 데모도 있었고, 심지어 갤러리 안에서 난동을 피우거나 위안부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사진전을 찾은 일본인들을 보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대한 긍정적인 미래를 봤다고 했다. “사진전을 찾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위안부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관심이 생기면 위안부 문제에 풀뿌리가 생기기 마련이죠.” 한편 이렇게 많은 일본인들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활발한 활동이 기저해 있었다. 그는 지난 해부터 일본 곳곳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강연을 해 왔다. 그 덕분에 일본에서 두터운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활발한 SNS활동으로 전시회 일정, 전시회가 부당 취소된 경위 등을 올리며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했다. “사진전을 할 때 모금도 함께 진행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다만 1000엔이라도 내면 그 문제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게

돼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6월의 전시회가 일방적으로 취소되자 이를 부당하게 여긴 일본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니콘사에 항의 메일을 보내는 사례도 있었다. 한편 도쿄 사진전의 앵콜요청으로 열릴 예정이던 오사카 사진전은 현재 니콘의 일방적인 취소 통보로 진행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10월달에 오사카에서 긴급항의 사진전을 갖을 예정이에요. 또한 재판을 통해 전시 취소 사유를 밝히고 니콘에 책임을 물을 예정이죠” 타향의 할머니를 집중 취재 그는 국내ㆍ외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모두 촬영하고 있지만, 특히 타향에 계신 할머니들에게 각별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갖고 있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중국으로 끌려가는 순간부터 위안소에서는 일본 이름과 일본어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쟁이 끝나고도 중국에 남겨진 순간, 살아남기 위해 중국말을 배워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절반 가까운 할머니들이 우리말을 잊었고 중국말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중 흑룡강성에 사시는 이수단 할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분께서는 60-70년 동안 침묵했던 이야기를 조선 땅에 살고, 조선말을 쓰는 우리가 갔을 때 중국말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에 오히려 부끄럽고 죄스럽다고 하셨어요. 그분의 잘못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는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국내에서의 움직임도 중요하지만, 일본 내부에서의 움직임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일본 내부에서 위안부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일어야만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사람들은 마음은 아파하면서 정작 행동에 옮기지는 않아요. 이제 할머니들은 길게 잡아야 5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요. 우리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아직도 타향에서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사시는 할머니들이 계시다는 점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계속해서 예술을 통해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알려나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숙명여대 학생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할머니들을 기억해주세요. 누군가가 이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진실의 역사는 사라지고 맙니다. 이들을 기억하고 진실의 역사를 지켜간다면 위안부 문제는 반드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단순히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로 보지 말아주세요. 아직도 아시아의 많은 피해여성과 일본의 많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전쟁과 여성인권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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