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인(정광고)

글제 : 사월의 끝

 

소복이 쌓인 벚꽃잎 때문에 발 밑이 폭신폭신했다. 공장의 먼지가 가득 묻은 운동화가 밟고 지나간 자리는 꽃 잎 위에 검은 발자국이 새겨졌다. 바람이 불자 발자국이 흩어지고 꽃 잎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무에서 떨어져 길을 잃어버린 꽃잎들은 서서히, 땅으로 내려앉았다. 벚꽃이 막 개화를 시작할 때 아내 모니카에게 편지를 보냈으니 아마 지금쯤 날아온 꽃잎처럼 도착했을 것이다.

편지 안에는 내가 사는 곳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 곳의 언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사장에게 맞았을 때에도, 친척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보았던 황혼의 빛깔을 떠올리던 날에도, 모니카의 생일날 깊은 어둠 속에서도 편지를 썼지만 보내지 못했다. 그나마도 이 곳에 온지 한참 만에 보낸 소식이었다. 모니카에게 눈에 대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니카는 눈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폭신하고 새하얀 눈에 대해 얘기할 때 모니카의 눈은 환상 속에 잠겨 있었다. 눈을 생각하며 현실의 눈빛을 빛낸 적이 단 한 번 있었는데, 그 것은 내가 돈 벌러 이 곳으로 가겠다고 얘기했을 때였다.

“그 곳은 눈이 오는 나라니까, 눈을 보면 내게 꼭 전화해 주세요.”

내가 이 나라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 곳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나는 모니카에게 전화할 수 없었다. 이 곳의 눈은 보드랍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눈 오는 밤 난방도 틀지 못한 방은 내 옷 전부를 껴입어도 하얀 입김을 뱉어내며 떨어야 했다. 눈은 쌓이고 차디찬 겨울은 흘러가는데, 통장의 잔고는 채워지지 못했다. 사월이 찾아오고 나서야 이 곳으로 올 때 들었던 경비를 갚고, 모니카에게 돈과 함께 편지를 부친 것이었다.

하나 둘 떨어지는 꽃잎을 맞으며 내 방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방 안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나는 끊어질 듯 울리는 전화를 달려가 받았다. 다행히 모니카의 목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모니카는 연락을 늦게 한 것에 대해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돈은 잘 받았다고, 눈을 보러 가니 좋겠다고 종알대던 때와 똑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은 왔어? 모니카의 목소리가 낮고 아득하게 울렸다. 그 목소리가 너무 생생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응, 왔어.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꼭 그 크기의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때? 입김처럼 옅은 바람이 부는지 벚꽃나무들이 살살 흔들렸다. 힘없이 매달려 있던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부드럽고 약간 촉촉해. 연한 분홍색이야.”

방 안은 달빛대신 내 목소리로 채워졌다. 그 안에 모니카가 자주 만들어주던 바나나튀김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방부제가 듬뿍 섞인 이 곳의 바나나로는 낼 수 없는 달콤한 향이었다. 나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모니카는 분홍색의 눈을 상상하는지 말이 없었다. 나는 눈은 녹으니까 가져갈 수 없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살랑,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을 따라 벚꽃잎이 들어와 창틀에 떨어졌다. 나는 벚꽃잎을 들어 올렸다. 내일 새벽에도 일을 나가야 했다. 나는 꽃잎을 살살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꽃잎이 달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거리의 나무들은 꽃잎을 거의 놓아버린 채 굳은 가지로 바람을 받아내고 있었다. 내년 이맘때면 다시 봄은 찾아올 것이고, 벚꽃도 만개할 것이었다. 그 때가 되면 모니카에게 눈 대신 봄의 온기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서걱, 어디선가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월은 그렇게 끝을 맺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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