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윤희(고양예고)

글제 : 사월의 끝

 

푸르스름한 빛이 어슴푸레 창을 넘어 이불께에 닿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세상은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아침잠이 달아나버린 건, 오래 전 일이다.

힘겹게 일으킨 몸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헤지기 시작한 모시옷이 등짝에 들어붙은 느낌이 들었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솜이불을 덮고 잔 탓이다. 새벽은 중간을 재려는 듯 좀 차다가도 곧 더워지길 반복했다. 벌써 사월의 끝물이었다.

요즘 들어, 아흔이나 되어서 죽지도 않는 이 몸뚱아리가 부끄럽게 여겨진다. 나는 나이에 비해 정정했다.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펼 수 있었고 내 치아는 누렇게 바랬을 뿐 아직 멀쩡했다. 눈이 좀 침침해지긴 했지만 젊은이들 중에서 나보다 나쁜 경우도 많지 않은가. 귀 역시 옆에서 말하는 소리는 잘 들을 수 있었다. 암과 치매도 나를 빗겨갔다.

“아이고, 무병장수 하십시오. 할머님.”

올해 불혹을 바라보는 큰 손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아니, 이제 불혹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이리 저리 사람을 만나고 다니길 좋아하던 그 녀석은 작년, 교통사고로 죽었다. 큰 아들은 그보다 오래 전에 사업실패로 자살했고 둘째 아들은 퇴직금을 모두 항암치료에 쏟아 붓고 있었다. 막내 딸은…… 치매가 빨리 왔다. 제 늙은 어미보다도 빨리 죽어가고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엄마가 이거 맛 좀 보시래요.”

연이는 귀농한 옆집 젊은 부부의 딸이다. 마흔 줄이면 아직 펄펄 날 때인데 왜 이런 시골 구석탱이로 왔을까.

“오빠 대학 때문이에요. 제 아토피도 있고.”

연이는 또래에 비해 당차고 똑똑한 편이었다. 버벅거리기는 해도 제법 꼬부랑 말을 읽었고 산수는 큰 도시에서 학교를 다녔을 때부터 잘했다고, 연이는 눈을 땡그랗게 뜨고 내게 자랑했다. 열넷, 열다섯, 열여섯. 그 무렵의 여자아이들처럼 밝고 건강하고 수다스럽고 또 생애에서 가장 싱그럽게 빛났다.

연이의 목 뒤의 피부는 붉고 꺼슬꺼슬했다. 팔과 다리가 굽혀지는 부분 역시 그랬다.

“아토피에요. 심한 애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암 것도 아닌걸요.”

연이의 하얗고 통통한 팔이 하얀 크림빵을 건넸다. 꼭 자신처럼 윤기 나는 빵을 먹던 연이는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저도 빵 먹었다고 말하시면 안 돼요, 할머니.”

아토피 때문에요, 라고 울상을 짓는 연이의 하얗고 통통한 볼이 움직였다. 인류가 태어난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쌀과 밀이 넘쳐나고 사람이 넘쳐나고 질병이 넘쳐난다. 욕심도.

“왜 이렇게 치열하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엄마, 산 팔자, 응? 요즘 묘자리 깔끔하게 잘 옮긴대.”

첫째 딸 년은 능력 있는 남편을 만나 꽤 괜찮게 살면서도 계속 산 팔자 노래를 불렀다. 제 아비가 묻혔든 말든 제 어미가 곧 누울 묘자리든 아니든. 유학까지 보낸 아들 놈이 취직도 못하고 집에서 뒹굴거린다니까, 그 때 그 산 안 팔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울 때는 가장 사랑했던 딸이거늘, 산을 안 팔겠다고 버틴 것이 그런 딸에게 영원히 원망 받는 어미가 되도록 만들었다.

연이는 까만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 있었다. 시뻘건 철쭉이 귀에 꼽혀 있었다.

“할머니, 여긴 진달래 엄청 많아요.”

고건 철쭉이란다, 하고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할머닌 어떻게 알아요?”

“알면 아는 것이지 무슨……..”

아직 진달래가 피긴 이르니까. 입이 텁텁하여 크림빵을 손으로 뜯어 입에 넣었다. 달콤하다. 진달래나 아카시아 꽃의 꿀보다도.

더운데 에어컨도 없고, 이젠 편의점도 없어서 몰래 콜라를 마시지도 못한다고 연이는 내내 투덜거렸다. 또래도 거의 없으니 심심하긴 할 것이다.

연이는 일어나 달력을 북- 찢었다. 사월의 달력을 한 손에 쥐고 흙바닥에 도로 내려가는 연이는 팔랑거리는 것 같았다. 빳빳한 달력 역시 팔랑거렸다.

“할머니, 접 때도 달력 저보고 떼달라고 했잖아요. 이제 오월이에요, 낼이면.”

통통거리는 몸짓이다. 탄력 좋은 세포들은 무엇을 해도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마치 4월의 끝에 놓여있는 것 같다, 연이는. 꽃처럼 활짝 폈고, 곧 푸르른 숲이 될 것이다. 저 나이의 싱그러움이 부럽다. 살짝 베인 상처도 쉽게 아물지 않는,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아흔이라는 숫자 말고.

연이는 찢은 달력으로 무얼 만들려는지 하얀 손가락을 꼼지작거렸다. 접고 접고 접어 작은 부채를 만든 연이는 팔랑, 부채질을 했다. 땀이, 삐질 흘렀다.

무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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