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삼국유사프로젝트> 첫번째 작품을 보고 나서

다가오는 가을, 국립극단은 <삼국유사프로젝트>로 연극 다섯 편을 백성희장민호극장에 올린다. 이들이 이 연극의 모티브로 삼은 <삼국유사>는 일연스님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설화와 신화들이 망라되어 있는, 우리 민족이 갖고 있던 상상 세계의 집합체다. 이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삶의 진리를 보여주는 새롭게 해석된 우리만의 고전을 만드는 것이 국립극단의 목적이다. 이 프로젝트의 첫 작품 <꿈>은 삼국유사 속 이야기에 식민지 시대 이야기를 더했다. 각기 다른 두 시대의 절묘한 병합과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 연극의 묘미다.

이러한 기대를 품고 찾아간 백성희장민호극장에는 평일임에도 관객들로 가득 했다. 극장의 무대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그 의문은 연극이 진행되면서 점차 풀려나갔다. 아래층 무대는 현실과 세속의 공간을 의미하는 반면 위층 무대는 구도와 번민의 공간인 낙산사를 나타냈다.

이 작품은 삼국유사의 조신지몽을 소재로 소설 <꿈>을 집필하는 이광수가 중심이 돼 이야기가 흘러간다. 이광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 속 인물이다. <무정>을 지은 소설가로 유명한 그는 2.8 독립선언문을 작성했고, 1919년부터 1938년까지 약 20년 동안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변절하여 1945년 해방되기까지 창씨개명과 일제 침략전쟁 전시 동원 독려와 같은 친일 부역행위를 했다. 해방 이후 그는 조선인들로부터 매국노, 친일분자라 불리며 비난을 받았다.

그는 극중에서도 <꿈>이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가 쓰는 소설의 내용은 무대 위쪽에서 진행된다. 여기 등장하는 조신은 원래 스님이었으나 월례와 사랑에 빠진다. 화랑 모례와의 결혼을 앞둔 월례는 조신이 있는 낙산사로 찾아와 함께 떠나자고 청한다. 조신은 결국 파계하고 결혼을 선택한다. 그들은 먼 곳으로 달아나 행복한 삶을 누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신과 함께 수행하던 평목이 화랑 모례의 명으로 조신을 찾아온다. 그를 못 본 체 하는 대신 조신의 딸 버들을 제 아내로 삼겠다고 협박한다. 결국 조신은 평목을 죽이게 된다. 조신은 스스로 저지른 금기된 욕망의 대가를 치루고 고통 속에 죽는다. 그러나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타인의 탓으로 돌린다. 한참 후 조신은 잠에서 깨어나고, 이 모든 일들이 한낮 허망한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조신의 꿈에서 드러나는 삶의 고통과 그 깨달음의 이야기는 한 때 민족 자주의 꿈을 꾸었으나 결국 좌절해 버린 “근대의 잘못된 첫 단추” 이광수의 꿈과 겹쳐진다. 이광수는 점차 조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독립운동가에서 민족반역자로 변한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목에 칼이 들어온 그 순간 순응했다고 평생의 노력이 헛되이 시궁창으로 돌아갔다”고 울부짖는다. 이렇게 이 작품은 우리에게 암울한 시절의 나약한 지식인의 변절을 과연 비난할 수 있는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이광수는 말한다. “조국이 어디 있어? 변절할 조국이 내 인생에 한번이라도 있었나? 한평생 그 조국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무슨 자격으로 나를 민족반역자라 하는가!” 그런 그의 앞에 젊은 시절의 이광수가 나타난다. 그의 내적갈등은 젊은 이광수와의 대립에서 극대화된다. 젊은 이광수는 친일분자로 낙인찍힌 이광수에게 “다수면 무죄인가? 당신이 타협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순수와 열정은 어디로 갔느냐며 그를 책망한다. 그런 젊은 이광수에게 이광수는 “나도 일개 인간일세.”라고 답한다.

 그의 변명이 길어질수록 젊은 이광수의 언성은 높아졌다. 이 때 무대 아래에서부터 휘날리는 욱일승천기(전범기)와 함께 나타난 전쟁에 참여했던 학도병들은 이광수를 향해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과거 “조선놈의 마빡을 바늘로 찌르면 일본인의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 모두가 일본인의 정신을 가져야한다. 조선의 학도여, 학도병을 지원하라!”라며 조선의 학생들을 전쟁터로 몰았던 이광수의 목소리가 무대에 울려퍼지고, 그는 또 한번 변절자로 낙인찍힌다.

그렇게 그는 해방 이후 시행된 반민족행위처벌법 대상에 포함된다. 심판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이광수에게 그의 아내 허영숙은 “가서 싸우세요. 살아남기 위해 변절하는 것이 욕먹을 짓인가. 칼날이 목에 들어온 순간, 그것밖엔 선택할 길이 없었다고 말하세요. 인생은 지옥이고 아귀판이에요. 살아남으려면 같이 아귀가 돼야 해요. 인생은 꿈이 아니라 악몽이에요. 지옥 같은 악몽!”라고 말한다. 이는 조국을 빼앗긴 백성의 정신적 지도자들이 겪어야 했던 인간적인 고뇌를 나타낸다. 그렇게 이광수에 대한 판단은 관객들에게 맡긴 채 연극은 막을 내린다.

대학로에 가면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서구문학 작품을 기반으로 한 연극과 가벼운 코메디극에 질렸는가. 그런 당신에게 <삼국유사프로젝트>는 한국인 특유의 미감과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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