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지막 수업 시간에 즐겨 보여주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장면이다. 참교육을 실천하고자 하는 선생은 모함을 받아 학교를 그만 그만두게 된다. 선생은 자신의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 수업 중인 교실에 들르고, 쓸쓸한 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가는 선생의 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보던 한 학생이 책상 위에 올라가 “선장님! 나의 선장님!”을 외치며 학교의 부당한 조치에 행동으로 항변한다. 그는 학교에서 퇴학당할 각오를 하고 그와 같은 행동을 했고, 다른 학생들도 그의 행동에 동참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이 장면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은 여러 가지겠지만 내가 굳이 이 장면을 보여주는 이유는 학생들에게 진정한 개인주의자가 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내가 염두에 두는 개인주의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라는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개인주의란 윤리적인 의미를 담은 것으로, 설령 다른 사람들이 올바름에 대한 생각 없이 그저 세태에 따라 표류한다고 해도 적어도 나만큼은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를 지키고 살아가려는 태도를 말한다. 물론 경쟁이 지나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올바름을 생각하며 살아가긴 정말 어렵다. 하지만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킬 것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개인주의자의 모습일 것이다.

내가 그리는 개인주의자는 사유와 실천의 조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실천 없는 사유는 공허하며, 사유 없는 실천은 맹목이다.” 우리가 아무리 지식을 많이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이를 바탕으로 올바름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와 같은 지식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거꾸로 나름대로 올바름을 실천한다고 해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러한 실천은 자칫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기 쉽다. 진정한 개인주의자는 경험을 정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지혜로운 사람이며, 여기에서 내려진 결론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와 같은 진정한 개인주의자를 만나기가 극히 어렵고, 그런 의지를 갖는 사람마저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심지어 사유와 실천 중 한 가지라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사람마저도 만나기가 힘들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유와 실천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어린왕자에 나오는 기차를 탄 사람들처럼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대학을 입학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국가와 민족, 그리고 그 안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학생들은 당면한 절박한 시대적 문제를 앞에 놓고 싫든 좋든 올바름을 화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문제가 희석되어 버린 요즘,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대학에 와서도 올바른 삶에 대해 고민해 볼 기회가 거의 없다. 이제는 자신이 의도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전혀 고민하지 않고서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게 돼 버린 것이다. 이런 시대에 살면서 교양 과목을 강의하고 있는 나라도 올바름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나는 종강이 될 즈음해서 진정한 개인주의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작은 외침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이거나 공허한 메아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는 변해가고 있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한 사람의 시대착오적인 몸부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진정한 개인주의를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내 자신을 새삼 되돌아보며 채찍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김성한 (의사소통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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