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문학 다시 읽기⑤ - 구운몽

 

 

  고등학교에서 많은 문학 작품을 배웠지만, 대학에 입학한 뒤 그것들은 어느 순간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 배운 기억은 나지만 그것은 의미를 상실한 채 지식의 편린으로만 남아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문학을 토막 내서 수험용이나 지식으로만 접근했던 것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 창작의 배경, 그리고 주제 중심의 ‘공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문학은 우리의 몸과 짝하지 못하고 필요했던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의  향기가 ‘몸’에 스며든 경험을 가졌다면, 문학에 익숙했던 몸은 다시 감동을 통한 변화의 기운에 내맡기게 된다. 문학은 본래 지식을 통한 변화가 아니라 감동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김만중의 <구운몽>은 참 많은 것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구운몽>은 우선 사람의 탄생을 저 멀리서 허위허위 달려와 이 세상으로 오는 여행으로 그리고 있다. 양소유는 저 먼 세상에 살던 성진이 팔선녀를 보며 잠시 사랑의 감정에 빠진 죄(?)를 지어 이곳으로 온 뒤 얻게 된 이름인 것이다. 그는 애교로 볼 수 있는 일탈의 현장을 떠나 더 큰 성장을 위하여 이 땅으로 여행을 온 것이다. 그 이름만 보더라도 소유(少遊)는 이 세상에 ‘잠시 놀러온’ 사람일 뿐, 그의 본 모습은 ‘참을 추구하는’ 성진(性眞)인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이렇게 외면의 보여지는 모습과 내면의 감추어진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군가가 이 세계를 향하여 툭 던져준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얼마나 재미없는 일인가! 저절로 인간이 생겨났다고 하거나, 또는 하늘에서 내려온 벌레가 인간이 되었다거나 ……. 그렇다면 인간은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허무의 모습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같이 숨을 쉬고, 도란도란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이 어찌 흙이나 나무와 같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이 다른 세상에서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겨 애써 찾아온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소중한 인연으로 맺어졌던 존재임을 알게 되면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감동으로 물기가 어리게 될 것이다.

  <구운몽>의 사람들은 전생에서의 소중한 인연을 잊지 못하여 다시 만나고 사랑을 나눈다.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삶도 결코 허투루 보낼 수 없는 것임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양소유의 일생은 여덟 여자를 찾아 자신의 여인으로 만드는 호색(好色)의 삶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여성을 거느리고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자 했던 남성상을 그린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덟 여자를 거느리는’ 모습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평등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이 그런 불평등을 용인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런 문학은 어디에 쓸 것인가. 평생 어머니의 이미지를 가슴에 안고 살았던 김만중 인데 왜‘여덟’여인을 한 남성과 인연을 맺게 하였을까? 작품은 그렇게 독자에게 수수께끼를 던지고 있다.

  수수께끼는 ‘묻고 답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묻기만 하고 대답을 생략해 버린다면, 그것은 수수께끼가 아닌 것이다. 여기에 대한 응답은 오로지 독자만이 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작품은 완성되기 때문이다. 원뿔은 위에서 보면 가운데 점이 찍힌 원이요, 옆에서 보면 삼각형이다. 보는 위치에 따라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원이나 삼각형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처럼 서슴없이 대롱이고, 벽이고, 기둥이라고 대답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가지고 작품이 제기하는 질문에 응답하는 소통의 체험을 하기 바란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나름대로의 응답을 하는 것이야말로 작품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면서 그 작품은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몸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하게 되면, 왜 진채봉이 양소유가 만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의 여인이 되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직의 길에 나설 수 없었던 조선의 여인들, 그리고 이 시대의 불평등에도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문학은 ‘상상력’을 기르고, 이를 자기화 하게 한다. 고전의 수수께끼는 당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퍼즐보다 흥미롭고 정교하다. 그만큼 우리를 허상으로 이루어진 현실에서 벗어나 깊고 그윽한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이 가을, <구운몽>을 꺼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보기 바란다.

한국어문학부 정병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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