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스포츠’의 아이콘, 김연아 선수는 전 국민에게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김연아 열풍보다 더한 열풍을 몰고 온 이가 있었다. 1973년 사라예보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 구기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 우승을 거머쥔 ‘사라예보의 전설’, 이에리사이다. 당시 19살의 팀 막내였던 이에리사의 선전으로 탁구 열기는 온 나라를 뒤덮었다. 요즘 스케이트장에 제 2의 김연아를 꿈꾸는 소녀들로 붐비는 것과 당시 탁구장에 탁구선수를 꿈꾸며 몰려드는 소녀들의 수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세계를 뒤흔들던 19세 소녀는 이후 지도자와 교수의 길을 걸으며 많은 운동인재를 양성해왔다. ‘사라예보의 전설’에서 ‘최초 여성 태릉선수촌장’으로 거듭난 이에리사를 만나봤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의 예상 성적과 그동안의 경기를 평가해본다면?
우리나라가 지난 베이징올림픽에서 7위를 차지한 것을 볼 때, 우리나라의 스포츠는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에요. 아시아에서 경쟁을 하기 보다 더 큰 무대인 세계와 경쟁해야 합니다. 아직 경기 중반이지만, 선수들이 도하 아시안게임 때 보다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2위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거라 봐요. 무엇보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하계스포츠의 상징, 박태환 선수가 재기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박태환 선수는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MVP였지만 지난해 로마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거든요. 박 선수에게는 ‘그 부진을 어찌 만회해야 하는가’가 굉장한 고민이었겠죠. 그러나 다행히 박 선수가 수영 200M경기에서 아시아신기록도 세웠고 100M, 400M경기에서 금메달 행진을 이어가는 것을 보며 매우 통쾌했어요. 그리고 또한 장미란 선수의 아시안 게임 제패에도 의미가 있어요. 장 선수는 올림픽, 세계선수권 대회 등에서 수차례 금메달을 거머줬음에도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이 없었거든요. 부상의 여파로 지난 터키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서 3위에 그쳤던 장미란 선수가 부상을 극복하고 금메달을 따서 너무 기쁩니다. 그 외에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핸드볼 선수들이 편파판정으로 인해 금메달을 빼앗겼는데, 이번에 금메달을 되찾아왔으면 좋겠네요.
‘최초 여성 태릉선수촌장’이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럽지 않았나?
태릉선수촌의 건립 이후 약 40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태릉선수촌장이 탄생했어요. 사실 저도 이러한 수식어가 부담됐지만, 저보다도 주변에서 더 왈가왈부(曰可曰否) 하더라고요. 선수촌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여자가 맡아도 되겠냐는 가시돋힌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러나 이와 같은 여성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저를 자극시켰고, 그로 인해 더 분발할 수 있었죠. 또한 제가 선수촌장의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쳐서 제2, 3의 여성 선수촌장이 탄생할 수 있도록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었어요.
선수촌장 재임 시절, 여자로서 남자 선수촌장과는 다르게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선수촌장이라는 직책에서 남자, 여자의 구별은 필요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다른 선수촌장들과 저와의 차이점은 있었지만 그것은 성별의 차이가 아니라 개인차일 뿐이에요. 다른 남자 선수촌장들은 선수촌에서 선수들이 새벽 훈련할 때 같이 운동하는 등 선수들과 살을 맞대며 숙식했어요.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며 생활하는 것을 중시했던 거에요. 반면에 저는 선수들이 훈련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도록 지원하고, 운동 환경을 개선하는 데 중점을 뒀죠. 선수촌의 예산을 높여 노후화된 시설을 복원하고 선진화된 체육시설을 갖추기 위해 애썼어요. 그 외에도 저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살려 ‘대화와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도 했어요. 선수들이 언제든지 찾아와 대화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거에요. 선수들이 감독이나 코치에게 직접 하지 못한 말을 제가 대신 전달해주기도 했어요. 선수들은 단순히 위로를 받거나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기 위해 말했을 뿐인데, 그 말들이 감독과 코치에게 전달될 줄 몰랐겠죠?(웃음)
선수촌장을 지내며 특히 힘들었던 점이 있나?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 점이 가장 힘들었어요. 선수촌장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운동선수들을 이끌고 관리하는 ‘대표중의 대표’이기 때문이에요. 아마 선수촌장의 부담감과 책임감은 여느 기관장들보다 더 할 거에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선수촌장을 지내면서 잠을 못 자는 날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저는 항상 선수들의 경기력을 향상시키고, 선수촌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영할지에 대해 고민했거든요. 또한 경제적ㆍ제도적 지원이 부족해서 선수의 경기력이 떨어질까봐 노심초사했죠.
선수촌장 재임시절을 떠올려 자신을 평가해본다면?
‘매사에 최선을 다한 선수촌장’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제도나 시설이 상당부분 개선되는 결실을 맺었거든요. 그 중 개선이 가장 시급했던 것은 선수들의 부족한 훈련일수였어요. 그래서 훈련일수도 105일에서 190일로 늘렸고, 내년에는 210일까지 늘어날 예정이에요. 아시안게임에서 연일 메달소식을 전해준 박태환 선수도 지난 로마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는 훈련부족으로 부진했어요.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 박태환 선수가 매일 맹훈련한 결과 좋은 성적을 거뒀어요. 선수들에게는 훈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죠. 또한 저는 지도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애썼어요. 항상 선수들만 주목받고 상금도 더 많이 받았는데, 선수보다 지도자에게 더 많은 상금을 줘서 지도자의 사기를 증진시켰죠. 지도자들의 높아진 위상 덕분에 선수들이 지도자를 더욱 잘 따라서 훈련 효과도 높아질 수 있었어요. 그 외에도 많은 시설을 개ㆍ보수해 선수들이 더 편한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했고요. 사격 훈련장의 표적을 수동에서 자동으로 바꾸고, 선수촌 내에 선수들의 휴식공간도 많이 만들었죠. 또한 턱없이 부족했던 여자 선수들의 기숙사를 마련했는데, 이를 위해 문화재청 앞에서 시위를 한 것은 유명한 일화에요. 저는 선수촌을 떠난 지금, 재임 당시를 회상해도 후회가 전혀 남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했어요.
베이징올림픽에서 종합 7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는데,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물러난 까닭은?
베이징올림픽이 끝난 뒤 제 임기는 6개월이 남은 상태였는데, 올림픽이 끝나면 더 이상 제가 할 일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따라서 베이징 올림픽 전부터 올림픽이 끝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고 짐도 다 싸놓은 상태였죠. 당시, 좋은 성적을 거뒀는데 왜 그만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저는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처럼 제 노력이 빛을 발했을 때 떠나는 게 맞다고 느꼈어요. 다행히 베이징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가벼운 마음으로 태릉선수촌을 나올 수 있었어요
대표적 여성 리더로서 숙명인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여성리더가 되려면 ‘나는 여자라서 안된다’라는 피해의식을 가져선 안되고, ‘나는 여자라서 못한다’라는 생각에 남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안돼요.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합니다. 남자는 경쟁자이자 동료일 뿐이라고 생각해야 돼요. 예를 들어, 남자 상사가 커피를 마시자며 커피를 타오라고 할 때 여자들은 ‘왜 나한테 커피를 타오라고 하지?’라고 생각하면서 불평해요. 하지만 입장을 바꿔서, 여자 상사가 남자 후배에게 ‘저 짐을 들어다 주실래요?’라고 할 때 남자들은 불평하지 않잖아요. 성차별로 인식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남ㆍ녀가 서로 나눠서 상부상조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선입견이나 편견의 틀을 깨야만 더 많은 여성 리더가 배출될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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