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심(안양예술고등학교)

어제 내린 비

어젯밤에 비가 내렸다. 아파트 복도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오늘도 비가 오려나.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 바람에서 비 냄새를 맡았다.
아파트 현관으로 내려갔다. 우편함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경비실에 딸린 화장실에선 쪼르르 물소리가 났다. 길에 고인 물웅덩이에 목련 꽃잎 두어 장이 동동 떠있었다. 가장자리부터 까맣게 시들어가는 목련 잎을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어쩐지 학교에 가기 싫었다. 남색 교복치마가 자꾸 팔랑거렸다. 길에는 나밖에 없었다. 아니, 어디서 ‘탁’하는 소리가 났다. 팽팽한 줄이 딱딱한 것에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그 소리는 자꾸 길 건너 공원에서 들려왔다. 횡당보도도 없는 도로를 그냥 걸어서 건넜다.
공원에 있던 건 초등학교 1학년쯤 돼 보이는 조그만 남자애였다. 나는 멀리서부터 그 애가 줄넘기를 연습하는 걸 지켜보면서 걸어갔다. 비 맞은 땅에서 무슨 줄넘기야? 아이는 열심히 연습하는데 한 번도 줄을 넘지 못했다. 계속 발이 줄을 넘지 못하고 걸렸다. 애가 연습하다 말고 내 쪽을 보았다.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씩 웃었다. 벤치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줄넘기 가르쳐줄까? 아이가 조금은 당황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치마는 줄넘기를 하기엔 너무 불편했다. 가방 속 체육복 바지를 꺼내 입었다. 치마 밑에 바지를 입고 다시 치마를 벗었다. 아이의 줄넘기를 받아서 좀 더 길게 줄을 늘였다. 나는 내 어깨 너비만큼 다리를 벌리고, 줄을 넘기 시작했다. 휙, 휙, 휙……. 줄 넘는 소리가 공원에 울렸다. 꼬마 애는 내가 줄넘기 하는 걸 입을 헤 벌리고 바라보았다. 쌩쌩이로 넘어가려는데 갑자기 배가 살살 아팠다. 줄넘기를 멈췄다. 어디선가 훅 비 냄새가 끼쳤다.
나는 아이에게 도로 줄넘기를 돌려주었다. 다시 바지 위에 치마를 입고 또 바지를 벗었다. 비 냄새가 계속 났다. 정말로 오늘 비가 또 오나? 손으로 아랫배를 문질렀다. 꼬마의 고맙다는 인사를 뒤로 하고 공원을 빠져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지? 학교에 가는 게 당연한데도 난 그 반대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이때까지 학교에 가기 싫었던 적은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온 지 다섯 달이 지났다. 가끔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피곤한 게 다였다. 나 나름대로 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째서일까? 정면을 보면서 길을 걸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빗물 웅덩이를 밟아버렸다. 다리에 물이 조금 튀었다. 평소에는 조금 있음 마를 거라고 그냥 넘어갔는데, 오늘은 무척 짜증이 났다. 화를 내다가 문득 깨달은 거였다. 오늘 난 꼭 내가 아닌 것만 같아. 이상하게도 시시각각 기분이 바뀌었다. 어젯밤에 비가 내려서 그럴까? 흠, 글쎄…….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것 같기도 하고 흐린 것 같기도 했다. 비 냄새는 여전했다.
같은 반 애를 보았다. 내 반대 방향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땅바닥을 보면서 걷기에 얼른 다른 곳으로 피했다. 그 애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입으로 뭐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얼핏 들어보니 영어단어였다. 손에는 자기 손바닥만 한 단어책을 들고 있었다. 그 애가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인도로 나왔다. 얼마 안 있음 기말고사란 게 떠올랐다. 오늘 학교 끝나면 바로 영어학원에 가야 한다는 것도.
사실 학교 수업을 듣는 것도, 영어학원에 가는 것도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니었다. 해야 한다고, 하라고들 말하니까 그대로 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뭘까?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오르막길이었다. 모르겠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 오르막길은 경사가 꽤 있었다. 이 동네에 이런 오르막길이 있었나…….
갑자기 또 아랫배가 아팠다. 배를 쿡쿡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 가까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에 가서 얼른 빈 칸을 찾았다. 아침에 먹은 게 이상했나? 그런데 음식을 잘못 먹었을 때 아픈 거랑은 좀 달랐다. 아랫배를 도려내고 싶을 만큼 배가 아팠다. 얼른 팬티를 내리고 앉았다. 눈을 아주 크게 떴다. 변기에 앉아 아주 오랫동안 그걸 들여다보면서,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어젯밤에 내린 비가 아닐까 생각했다. 물씬 비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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